어느푸른저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시월의숲 2013. 9. 30. 01:05

어제는 결혼식에 다녀왔다. 결혼식의 주인공인 그녀는 내 전임자로서 내게 업무상 알아야 할 것들을 많이 가르쳐 준 사람이었다. 나이는 나보다 한 살 많았고 여느 여성과는 다른 특유의 씩씩함과 다감함을 가진 사람이었다. 처음 맡은 업무로 인해 우왕좌왕하던 내가 사소한 것까지 물을 때도 그녀는 귀찮은 기색은 커녕 늘 환한 웃음으로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그녀의 결혼식에는 예상대로 많은 하객들이 와서 분주했다. 특유의 싹싹함과 다정다감함은 자연스레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마련이니까. 나는 신부측이라고 쓰여진 곳에 부조금을 내고, 신부대기실로 올라가 얼굴도장을 찍었다. 그녀는 정신이 없어 보이는 와중에도 자신을 보러 온 사람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인사를 했다. 무척이나 밝은 표정 속에 어떤 후련함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나는 예식장으로 돌아와 그녀의 남편이 될 사람과 신부입장까지만 보고 식사를 하러 1층으로 내려왔다. 그녀는 남편이 될 그 남자를 전보를 갔던 지역에서 만났다. 그녀가 간 지역은 산간벽지였는데, 처음에는 홀로 벽지에 가게 되어 많이 울었다고 했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그곳에서 그를 만나게 될줄을.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지금은 누구나 다 알게 되었다. 그들은 결혼을 한 것이다.

 

예식장에서 식사를 하고 도서관까지 걸었다. 집에 바로 가지 않고 도서관에 들러 반납할 책을 다시 빌릴 생각이었다. 김영하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라는 소설집이었다. 나는 이 책을 이 주 전에 빌려놓고 아직 반도 못 읽고 있었다. 반납하라는 문자메시지를 받고서야 내가 그동안 이 책을 빌려놓고 다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상하지. 나는 예전에 김영하의 소설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때는 무척이나 재밌게, 빠져들도록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랬던 내가 오랜만에 집어 든 김영하의 소설을 반도 읽지 않고 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더이상 나는 김영하의 소설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가? 나는 그것을 확인해보기 위해서라도 이 책을 다시 빌려야 했다. 그동안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혹은 작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90년대와 이 천 년대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래서 알아 냈느냐고? 오늘 이 소설을 다 읽고나서 든 생각은 확실이 무슨 일이 일어나긴 했는데, 그게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다만 이렇게 말 할 수 있겠다. 김영하가 그려 낸 인간들의 욕망의 지도가 이젠 그리 매혹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90년대에 한정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 이제 우리의 욕망은 더없이 노골적이지 않은가? 늘 현재형이어야 하는 작가에게 너무 잔인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어디까지나 이건 지극히 주관적이고 즉흥적인 내 생각일 뿐이므로, 그리 신경 쓸일은 아니겠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르던 때, 우리는 타인의 이야기(욕망)에 민감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들 모른척 하는 지금, 우리는 타인의 이야기에 더이상 민감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우리의 추악한 모습을 볼대로 다 보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더이상 놀라지 않는다. 격렬한 슬픔도, 한없는 기쁨도 느끼지 못한다. 그런 우리들에게 어떤 이야기가 있을 수 있을까? 하루종일 집밖으로 나가지 않고 컴퓨터 혹은 스마트폰 앞에 붙어 있는 자에게 무슨 이야기가 있을 것인가? 혹 있다한들 그것이 얼마나 매혹적인 것이 될까? 김영하의 소설을 읽고나니 엉뚱하게도 그런 생각이 든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그런 이야기란 어떤 것일까 하는. 그런 것이 있기나 한 것인지. 우리에게 남은 것은 감정의 과잉과 행복에의 과장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