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어린 시절의 옛날에 대해 함께 말할 수 있는 사람

시월의숲 2013. 11. 5. 20:38

  한부리는 그녀 앞에 늘어선 세 남자들 중에서 한 남자의 목숨밖에는 구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몸이 떨린다. 그녀가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그녀의 시선이 우선 남편에게로 향한다. 그리고는 아들을 바라본다. 마침내 남자 형제에게로 시선을 던진다.

그렇지만 그녀는 남자 형제의 목숨을 구하기를 선택한다.

  그녀는 이렇게 주장한다. 남편을 향해 몸을 돌려서 그의 손을 잡았다가 다시 놓아버린다. 그녀가 말한다: "나는 다른 남자와 결합할 수 있어요."

  아이 쪽으로 돌아서서 아이의 뺨을 어루만지면서 그녀가 말한다: "나는 다른 아이를 가질 수 있단다."

  남자 형제에게로 향하여 말한다: "내가 돌아가신 부모님을 되살아나시게 해서 새 형제를 수태하시도록 할 수는 없어."

  바로 그것이 택해야 할 남자에 대해 한부리가 내린 판단이다.

  (이 수수께끼는 원하는 만큼의 많은 해답을 지니고 있다.

  인디언 여자의 해답은 매우 아름답다. 그 여자는 말한다: "내 어린 시절의 옛날에 대해 함께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남자 형제뿐이다. 어떤 남편도 어린 소녀였던 나를 영원히 모른다. 내가 뱃속에 지녔던 아이는 자신의 모든 꿈들을 내가 살아 있지 않을 미래의 시간에 바친다.")

-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  236쪽.

 

 

*

파스칼 키냐르의 책을 읽다가 발견했다. 여자는 자신의 앞에 늘어선 세 남자들 중에서 한 남자의 목숨밖에 구할 수가 없다. 과연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이 수수께끼 같은 물음은 원하는 만큼의 많은 해답을 지니겠지만, 파스칼 키냐르는 남자 형제를 선택한 여자의 목소리만을 들려준다. 왜 남자 형제인가? 여자에게 있어 남자 형제란 어떤 의미를 지니기에? 한부리와 인디언 여자의 대답 모두 아름답다. 여자에게 있어 남자 형제란 대체 불가능한 존재인 동시에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함께 말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자신에게 있어 유일한 존재이자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너'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 파스칼 키냐르의 저 글을 읽고 나는 내 동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생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앞서 내가 동생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 나는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몇 개의 사진으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그것도 정신을 집중했을 때에만 간신히 떠올릴 수 있는 단편적인 기억들. 그 속에서 그녀는 웃고 있으면서도 어쩐지 얼굴에 쓸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내 영향이었을까? 내가 가진 알 수 없는 울분과 불안이 바이러스처럼 전이되어 그녀의 어린 시절을 불행하게 만들었을까? 그녀가 내가 쓴 일기를 계속해서 읽었다는 고백을 들었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우리는 어린 시절 같은 방에서 공부했고, 같이 그림을 그렸으며, 목에 핏대를 세우며 함께 노래를 불렀다. 언젠가 나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무언가에 쫓기듯 집으로 왔던 기억이 있다. 그녀도 그것을 기억할까? 내 기억 속의 동생과 동생의 기억 속의 나는 얼마나 다른가. 공유하고 있는 기억이란 단지 손에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어린 시절을 함께 했었다는 것, 세상에서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은 서로 간에 독특한 유대감을 불러일으킨다. 그건 나와 내 동생이 가진 배경의 특수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진저리쳐지는 일일수도 있지만, 서로 살게 하는 버팀목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파스칼 키냐르의 저 글을 읽고 나서 들었다.

 

어린 시절의 동생을 생각하면, 역시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오르고,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조금 슬퍼진다.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어린 시절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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