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평범하기 위해 필요이상으로 애를 쓰거나 혹은 애를 쓰지 않았다면

시월의숲 2013. 12. 31. 23:08

*

 

오늘따라 바람이
저렇게 쉴새없이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여의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 박성룡, '바람 부는 날' 중에서

 

 

*

동생이 이사를 했다고 해서 김해에 다녀왔다. 이사를 한 곳은 전에 살던 곳 근처에 있었다. 동생은 조금이나마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어서 기쁘다고 했다. 아파트의 구조는 전에 살던 곳과 같았지만 방의 크기가 커서, 아이들을 키우기에 좋을 것 같았. 두 조카들은 못본 사이에 제법 컸고, 소란스러워졌다. 우리(나와 아버지, 고모와 내 고종사촌들)는 동생 내외와 차를 타고 나가 고기뷔페를 먹었고, 주남저수지에 갔다. 이름만 들어본 주남저수지는 생각보다 넓었다. 그날이 가장 추운 날이라고 해서 걱정을 했는데, 저수지에서 맞은 바람은 춥기는 커녕 오히려 상쾌하기까지 했다. 겨울의 저수지는 온통 갈색빛이었다. 사람 키를 훌쩍 넘긴 이름모를 풀과 저수지를 둘러싸고 있는 갈대, 먼 곳에 있지만 울음소리만은 생생히 들렸던 가창오리떼가 기억난다. 처음엔 철새들이 너무 먼 곳에 있어서 아쉬웠는데, 이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갑작스럽게 날아오른 철새떼의 군무에 순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언젠가 다시 와보리라 다짐하게 만드는 풍경이었다. 그렇게 주남저수지를 둘러보고 집으로 와 동생이 차려준 저녁을 먹었다. 결혼 하기 전에는 요리를 하기 싫어서 라면만 먹던 아이였는데,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니 저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모양이었다. 제법 솜씨있게 만들어내는 음식을 먹고 있으니 대견하기도 하고 괜히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나는 설명하기 힘든 기분이 들때마다 생각한다. 우리가 단지 평범하기 위해 필요이상으로 애를 쓰거나 혹은 애를 쓰지 않았다면, 그것은 남들보다 일찍 엄마를 여의었기 때문일 거라고.

 

 

*

새해엔 우리 모두 좀 덜 쓸쓸했으면 좋겠고, 매사에 안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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