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이방인 놀이

시월의숲 2013. 12. 26. 19:07

'이방인 놀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소설가 배수아가 어느 책에서 쓴 것인데, 책의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다.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 매우 간단한 놀이다. 이방인 놀이라고 해서 반드시 낯선 장소에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장소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니까 일단 내가 어디에 있든 우선 나를 이방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걷는 이 길과, 저기 보이는 건물을 마치 처음 본 것처럼 대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를 모국어가 아닌 생전 처음 듣는 언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이방인의 눈으로 모든 사물을 바라본다. 대충 이런 방식이었던 것 같다. 나는 배수아가 말하는 이방인 놀이에 대한 글을 오래전에 읽었다. 그땐 미처 알지 못했지만, 어제 즉흥적으로 버스를 타고 마지막 역에 내리면서 깨달았다. 내겐 굳이 이방인 '놀이'가 필요치 않다는 사실을.

 

조금의 감상이나 허세 따위를 가미하지 않고 말하건데, 나는 예나 지금이나 늘 이방인이었다. 풍경에 섞이지 못하고, 누군가를 온전히 마음에 품거나 누군가로부터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꽤나 이질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그것은 나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만든 벽이거나, 타인이 내게서 느끼는 알 수 없는 거리감일 수도 있다. 스스로가 이방인인 자에게 이방인 놀이라는 것은 우스운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몇 년 동안 지나다닌 거리도, 늘 보았던 건물도, 나를 스쳐지나갔던 사람들도 내겐 익숙해지지 않는 이국의 풍경인 것만 같다. 나는 다가가지 않고, 누군가 내게 다가오지 않는다. 너와 나 사이의 보이지 않는 거리. 그것은 누가 만든 것인가?

 

이방인이 느끼는 낯섦은 분명 대상과 자신의 거리에서 나온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 낯선 감정. 기름과 물처럼 섞이지 못하고, 늘 부유하는 존재. 운명같은 예감. 그래서 내가 배수아의 글을 처음 읽었을 때, 한동안 꼼짝할 수 없었던 것일게다. 마치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내 비밀을 기록해 놓은 것 같아서. 슬프진 않지만, 쓸쓸하다. 이방인에겐 슬픔보다는 고독이 더 잘 어울린다. 누구나 다 고독하지만, 고독의 색깔은 저마다 다르다. 그 낯섦을 놀이로서 즐길 수 있다면 그는 더이상 이방인이 아닐 것이다. 이방인이지만 이방인이 아닌자.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어제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