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2014년 겨울, 당신은 안녕하신가요

시월의숲 2014. 1. 3. 22:51

영화를 보고 저녁을 먹자고 했다. 신년회 겸 새로 발령받아 온 동료와의 친목을 도모하자는 취지였다. 일과를 끝내고 거리로 나오니 믿을 수 없을 만큼 포근한 날씨에 우리는 모두 어리둥절했다. 2014년 1월 2일, 겨울의 한가운데 내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나는 다른 이들보다 먼저 영화관에 들어가 표를 끊었다. 실존했던 인물을 영화화한 <변호인>이었다. 나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도, 아직 그에 관해서 이야기하기에 때가 너무 이른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아직 애도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너무 일찍 역사 속으로 밀어 넣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는 그것이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적절한 시기에 나온 것 같기도 하고, 너무 늦게 나온 것 같기도 했다. 누군가는 영화를 보면서 끊임없이 전화기를 만졌고, 하품을 해댔으며, 이 영화가 결국엔 허구임을(영화의 맨 처음 자막으로 나왔듯이) 재차 강조했다. 그렇다. <변호인>은 결국 영화이고, 오락이며, 하나의 문화상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흥행하는 이유가 단지 재밌기 때문만은 아니리라고 나는 믿는다. <정의는 무엇인가>가 오랜기간 판매율 상위에 오르고, 영화 <광해>가 천만이 넘는 관객을 모은 것 또한 <변호인>이 흥행하는 이유와 같은 어떤 '열망'이 있었기 때문일 거라고 나는 믿는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광해>, <변호인>은 모두 어떤 올바름, 혹은 아주 기본적인 가치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되기 이전의 인간 노무현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그가 지키려고 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거니까. 영화를 보고 나서 우리나라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다가도, 이젠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깊은 상실감을 느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껏, 지금 내가 사는 이 사회가 그와 같은 사람들로 인해 좀 더 나아졌고, 그래서 정말 고마웠다고 혼자 생각하는 것밖에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나만의 애도는 아니었던지, 영화관을 나오면서 다들 그 시대의 불합리와 억압에 분노했고, 송강호의 실감 나는 연기에 감동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천천히 걸어 늦은 저녁을 먹으러 갔고, 오리고기에 소주를 마셨다. 저녁만 먹고 헤어지기가 아쉬웠던지, 누군가 노래방에 가자고 했고, 결국 노래를 불렀으며, 다시 문어와 낙지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셨다. 누군가 안녕들 하십니까, 라고 묻는 것 같았으나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아, 어쩌면 그것은 내 착각일 수 있다. 사람들은 모두 안녕한 얼굴로 나를 스쳐 지나갔지만, 그또한 내 착각일 수도 있고, 어두워서 자세히 못 본 탓일 수도 있으며, 어쩌면 술기운 때문인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