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나를 통과해 간 바람은 어디에 머무는가

시월의숲 2013. 12. 30. 22:55

연말인데, 연말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성탄절에도 성탄절 기분이 느껴지지 않았듯이. 감정이 무뎌진 것인지, 철이 든 것인지, 나이가 든 것인지 모르겠다. 올해 유독 연말 기분이 들지 않는 것은, 감정이 무뎌진 것일 수도, 철이 든 것일 수도, 나이가 든 탓일 수도 있다. 연말이 되면 흔히 느껴지는 심란함이랄지, 인사이동에 따른 직원들과의 헤어짐과 새로운 만남의 스트레스랄지, 한 해를 아무 의미 없이 보냈다는 자괴감 같은 감정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나와는 무관한 감정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나와 상관없는 감정이라는 건 얼마나 평화로운 것인가, 혹은 얼마나 죽음에 가까운 것인가. 나는 약간의 당혹감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본다. 시간은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흘러가고, 나를 통과해 간 시간만큼 나라는 그물은 성글어진다. 점점 더 커다란 구멍이 생긴다. 그 구멍으로 세찬 바람이 들이닥친다. 나를 통과해 간 바람은 어디에 머무는가. 바람이 잠시 내게 머물다 가는 것인가. 궁금하다, 바람의 행방이. 궁금한 것이 어디 그 뿐일까. 나는 점점 더 성글어지고, 희미해지며, 종래에는 사라질 것이다. 나는 투명해지고 싶다. 희미해져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투명해져서 스며들고 싶다. 그게 어디든, 누구든, 무엇이든 신경 쓰지 않으리라. 나와 상관없는 감정에 익숙해져야만 하는 날들이 온다. 나는 그 날들을 지나가고 있다. 조금의 슬픔이나 쓸쓸함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