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월의숲 2014. 1. 12. 17:39

신형철의 문학이야기(북캐스트)에서 소설가 김연수 편을 들었다. 작가는 타인을 이해하기 위하여 소설을 쓰고, 독자는 자기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소설을 읽는게 아니겠냐고 김연수는 말했다. 예전에 어떤 이로부터 왜 소설을 읽느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그때 나는 공감이니 뭐니 두서 없는 말을 했었다. 그날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 본 결과, 소설을 읽는 이유는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소설은 어쨌든 타인들의 이야기고, 그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당연히 그들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김연수의 말을 듣고보니 그건 좀 단순하고 순진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소설을 읽는다는 건,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 을 통해 '나'를 들여다보는 일에 좀 더 가까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소설을 읽는다고 해서 내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가? 공감이라는 것은 결국 나 자신 안에 들어있는 어떤 감정의 선이 타인의 이야기 속에 담긴 감정의 선과 공명했을 때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아니던가? 그러니까 결국 공감이라는 건, 타인의 감정이 우선이 아니라 나 자신의 감정을 우선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이 아닌가 말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쉽사리 이해하지 못한다(이건 당연한 일이다). 모든 이해는 오해의 다른 이름이라는 말은 그래서 생겨난 것일게다. 똑같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네가 느끼는 감정과 내가 느끼는 감정이 어찌 같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면, 그건 내가 느낀 감정이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나만의 예감 혹은 추측일 뿐.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나 자신을 좀 더 들어다보는 일은 그보다 가능에 가까운 일일지 모른다. 나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나' 자신 뿐일테니까. 그러므로 나를 좀 더 이해하고자 노력한다면, 타인에 대한 이해도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아니, 이렇게 말해야겠다. 이해불가능한 타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 그것이 부질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유일하게 인간다운 일일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