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피아노

시월의숲 2014. 4. 5. 21:05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전봉건,  '피아노', 『꿈 속의 뼈』, 1980.

 

 

학창시절에 시집을 사서 읽지 않았으니, 아마도 국어책이나 문제집에서 처음 이 시를 읽었을 것이다. 그때 이 시를 읽고 꽤 신선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피아노와 물고기와 파도라니. 그래서일까? 이틀 전에 이리나 실리바노바와 막심 푸리진스키라는 러시아의 피아노 듀오의 연주회를 다녀온 후 이 시가 생각났다. 남성과 여성 연주자가 서로 각각의 피아노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서 연주를 했는데, 내가 앉은 곳에서는 여성 연주자의 손을 볼 수 있었다. 정말, 그 모습이 마치 물고기가 물 위를 튀어 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아, 어쩜 이건 내 상상력의 빈곤을 드러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피아노를 치는 연주자의 손은 빛을 머금은 물고기처럼 보였고, 피아노의 선율은 밀려갔다 밀려오는 파도의 움직임처럼 느껴졌다. 피아노는 어쩌면 파도를 따라 유영하는 물고기의 음악이 아닐까? 혹은 파도의 음악? 달과 바다의 연애처럼, 밀고 당겨지는 선율이 무척 아름다웠다. 처음 공연 프로그램을 보았을 때, 내가 아는 곡이 별로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들어보니 그렇지 않았다. 피아노가 연주되자 마음 속에서 아, 하는 탄성이 흘러나올만큼 한 번쯤 들어본 곡들이 많았다. 가장 인상적인 연주는 아람 하차투리안의 스파르타쿠스 중 '아다지오'였다. 두 대의 피아노로 연주되는 아디지오는 교향곡 못지않게 풍성하고 극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밖에 피아졸라의 탱고도 있었고, 조지 거쉰의 곡도 있었다.

 

전문 연주자의 피아노 연주를 공연장에서 듣기는 처음이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내가 예매한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고 무대를 바라본다. 조명이 켜진 무대 위에는 까만색의 커다란 피아노 두 대가 서로 마주보며 굳건히 서 있다. 그 존재감만으로도 탄성을 자아내기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중간에 관장이 나와서 공연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해주었는데, 피아노는 바이올린처럼 완벽한 악기가 아니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전공자나 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면 아마 알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말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어쩐지 그날만큼은 적절한 발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틀렸다는 게 아니라 어울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어쨌거나 피아노가 주인공인 날이 아닌가! 그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적절했든 아니든 간에 연주를 감상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공연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니 주최측에서 연주자들의 CD를 판매하고 있었다. 나는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이 담긴 CD를 샀다. 공연장 밖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집으로 걸어 오는 길에 우산을 쓴 채 가방끈을 조이다가 그만 빗물이 고인 웅덩이에 가방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기분이 나쁘진 않았고, 이상스레 웃음이 나왔다. 이게 다 피아노 연주 때문이라고 한다면 너무 유치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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