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어떤 위로

시월의숲 2014. 3. 28. 00:05

"존재에 변화를 줄 수 없는 그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사소한 사건이 생길 때마다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자 사냥꾼은 세 번째 사자를 잡은 뒤부터는 더 이상 모험심을 느끼지 못한다."

 

"존재의 변화가 없을 때까지 존재를 단조롭게 하라. 가장 사소한 것이 흥미로운 일이 될 때까지 하루하루 감정을 이완하라. 지루하고, 똑같고, 불필요한 노동에 날마다 몰두하다 보면 내 앞에 탈출의 환영이 나타난다. 머나먼 섬에 대한 상상 속 이미지가, 과거에 있었던 공원의 거리 축제가, 다른 감정이, 다른 내가 나타난다."

 

"단조로움, 지루하게 비슷한 똑같은 일상, 차이가 없는 오늘과 어제. 그것이 늘 내게 남는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내가 무엇이라도 되었다면, 나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을 읽다가 만난 문장들. 요즘 내 삶, 내 생각, 내 육체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지루하고, 똑같고, 불필요한 노동'과 '단조로움, 지루하게 비슷한 똑같은 일상, 차이가 없는 오늘과 어제'가 딱 요즘의 내 상태다. 하지만 페소아는 다시 말한다. 그게 지혜로울 수 있다고. 그것이 모든 사물과 사건에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게 한다고.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상상할 수 있다고. 정말 그런 것일까? 혹 이것이 단순한 말장난이거나 얄팍하고 가식적인 위로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말하지면 이건 패배자의 변명이 아닌가? 하지만 나는 저 문장들을 읽고 어쩔 수 없는 슬픔을 느낌과 동시에 어떤 점진적인 위로를 느꼈다. 하지만 상상만으로 행복을 느낄만큼 나는 아직 강하지 못하다. 존재를 단조롭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내 존재는 충분히 단조로우므로. 그래도 어쩌나,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상상하는 것 뿐인데. '아무것도 아닌' 내가 그 '아무것도 아님'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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