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말, 잔인한

시월의숲 2014. 4. 20. 22:40

텔레비전에는 지난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전복된 세월호의 실종자 구조작업과 유가족들을 계속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텔레비전을 껐다. 끌 수밖에 없었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니, 머리가 무겁고 어지러웠다. 자주 울컥 하는 순간이 찾아와서 가만히 화면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텔레비전에는 수많은 말들이 넘쳐흘렀다. 격앙된 말과 분노의 말, 슬픔의 말과 잔인한 말, 위선의 말과 거짓의 말들이. 나는 그 말에 질식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뉴스의 앵커가 분석한답시고 하는 말들과 기자들이 유가족들을 취재한다는 명목으로 자행하는 잔인한 말들에 나는 거의 기절할뻔 했다. 부모를 잃은 아이에게 부모의 행방을 묻고, 친구를 잃은 학생에게 친구의 생사를 묻다니! 그건 내가 중학교를 다니던 때, 처음 보는 어떤 할머니에게서 들은 말과도 같지 않은가. "네 할머니가 돌아가신거 알고 있니?" 나는 그때 그 말을 한 할머니의 얼굴을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나를 위한답시고 하는 말, 혹은 아무 생각없이 한 말이 더욱 잔인한 비수가 되어 가슴 깊이 박히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타인의 슬픔과 절망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혹은 얼마나 느낄 수 있는가? 자식이 없는 내가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다만 혈육을 잃는다는 것이 어떤 심정인지, 내 경험에 비추어 짐작할 수 있을 뿐. 그 누구도 타인의 고통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고, 타인의 슬픔과 분노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말을 아껴야 한다. 신중하게 말을 해야 한다. 하지만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 어디에도 진실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누군가 진실을 차분하고 냉철하게 말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진실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진실인가? 나는 혼란스러웠다. 말들의 홍수 속에서 침묵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 지금은 침묵할 때가 아니라고, 아직은 죽음을 애도할 때가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아직은 때가 너무 이른 것인지도 모른다. 아직은 분노와 슬픔의 한 가운데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많이 분노하고 많이 슬퍼해야겠지. 하지만 정당한 분노와 정당한 슬픔이어야만 할 것이다. 거짓되고 위선적인 말에 휘둘리지 않는.

 

아, 나는 되도록이면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어떤 말도 내뱉고 싶지 않았다. 경기도지사가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처럼, 비아냥거림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감상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지독하리만치 순수해서(그렇게 믿고 싶다) 웃음거리가 되기 싶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그만의 애도의 방식이라면. 나 또한 이것이 나만의 애도의 방식이라면.

 

실종이란 말의 잔인함을 생각한다. 숫자로 표시되는 생사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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