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모란

시월의숲 2014. 4. 26. 12:13

 

 

 

한창 모란이 피고 있다. 향기가 온 사방에 진동한다. 산책을 하다가 막 피기 시작한 모란 가지 하나가 꺾여져 있는 것을 보았다. 안타까운 마음에 사무실에 가져다 유리병에 물을 채운 뒤 꽂아 두었다. 모란은 자신의 뿌리가 잘려 나갔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금세 꽃잎을 활짝 펼친다. 덕분에 사무실에도 모란 향기가 가득하다. 풍성하고 탐스러운 모양새를 보고 있으면 보름달처럼 마음이 차오른다. 그래, 피어라 피어. 피는게 네 일인걸. 너는 이렇게 열심히 피고 있는데, 나는 무얼 하고 있지? 모란이 자꾸만 나를 다그치는 것 같다. 나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어깨가 움츠러든다. 모란은 그냥 거기 피었을 뿐인데. 모란은 끊임없이 피었다 질 것이고, 변하지 않는 것은 나인데. 누구의 관심도 받기 싫고, 어떤 관계도 필요치 않는 나와, 뜨거운 열정을 동경하고, 변화를 충동질하며 유대와 관심을 갈망하는 내가 있다. 하지만 늘 그렇듯 미적지근한 타협과 변명만이 남는다. 그것을 정면으로 응시하기란 괴로운 일이다. 나 자신의 나약함을 직시하기란 어려운 일이므로. 그렇게 이 순간을, 이 하루를, 이 봄을, 이 시절을, 내 삶을 보내고 있다.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이건 배부른 자의 허영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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