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고양이

시월의숲 2014. 6. 27. 22:20

길을 걷다가 고양이를 보았다. 잿빛의 털을 가진 고양이도 있었고, 검은 털을 가진 고양이도 있었다. 그들이 아마도 이 구역의 주인인듯했다. 인간과 같이 생활하면서 야성을 잃지 않는 거의 유일한 동물인 고양이는 결코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주차해 놓은 자동차 아래로, 낮은 담벼락 사이로 몸을 잔뜩 낮춘채 늘 경계하듯 걸어다니지만, 그건 인간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그것이 그들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들을 보면서 괜히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하지만 그건 아무 의미없는 일이고 어쩌면 우스운 일일지 모른다. 퇴근길에 고양이를 보면서 생각했다. 내가 어떤 위험에 처했을 때 저 고양이가 나를 구해줄지도 모른다고. 나는 너무나도 뜬금없는 생각 때문에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알 수 없는 확신이, 역시 알 수 없는 이유로 들었기에 이내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고양이가 나를 구해주는 것은 거기 고양이가 있었기 때문이지, 위험에 처한 나를 위해 달려온 것은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우연에 의한 것이다. 우연. 그건 고양이를 설명하는데 무척 적절한 단어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고양이는 우연히 생겨난 동물이 아니라, 우연으로 만들어진 동물이다. 그들의 부드러운 곡선은 우연의 음악이고, 그들의 소리없는 발자국은 우연의 문장이다. 그들은 온몸으로 들리지 않는 음악을 연주하고, 온몸으로 보이지 않는 문장을 만들어낸다. 나는 우연히 그들과 조우한다. 그들은 나와 아주 가까운 곳에 살고 있지만, 우리들의 만남은 순전히 우연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우연한 만남. 길들여지지 않는 만남.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인간에게 배타적이고, 그러므로 늘 새로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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