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어떤 표정

시월의숲 2014. 6. 26. 22:24

그 사람이 하는 일이 그의 모든 것을 규정짓고, 그의 표정, 말투까지 결정지어 버린다면 그건 좀 억울한 일이 아닐까? 그래, 이건 슬픈 일이라기 보다는 억울한 일에 가까울 것이다. 그가 하는 일이 그가 원하는 일이었다면 그는 기꺼이 일에 관계된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지만, 그렇지 않고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게 된 일(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지 않을까?)이라면 그 억울함은 더욱 클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억울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며, 자신이 하는 일이 자신을 규정짓고, 자신의 표정과 말투를 결정지어 버린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는 늘 그 일을 해왔으므로 그의 표정과 말투 또한 육체노동자의 굳은살처럼 단련되어 자연스럽게 굳어버린 것이다. 내가 본 사람도 그러했다. 그는 오랜기간 조직의 감사업무를 맡았는데, 감사업무라는 것이 그렇듯, 누군가 해놓은 일의 잘잘못을 따지고 그것의 경중을 매겨서 처분이나 징계의 수위를 결정해야만 하는 일이므로, 그의 표정은 늘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비웃는듯 했고, 때로 신경질적으로 보였으며, 앞으로 약간 내민 턱 때문에 자연스레 아래로 향한 시선은 그를 다소 거만하게 보이게 했다. 그것은 서류를 볼 때도 마찬가지여서, 때로는 서류 자체에 불만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부족한 서류가 나오면 상대방을 추궁하듯 쏘아붙였는데, 그 앞에서 있으면 누구나가 다 벌받는 기분을 느꼈고, 자신이 잘못한 것은 없는지 고민했다. 나는 그의 표정을 천천히 살펴보았는데, 놀랍게도 비호감으로 보이던 그의 얼굴이 원래부터 그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때로 그는 비웃음처럼 보이는 웃음을 지었는데, 그 웃음이 어느 순간 그의 굳어버린 표정을 잠시나마 풀어주는 역할을 해서, 원래부터 그가 그런 표정을 하게 된 것은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게 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진지하게 이야기할 때의 그의 눈빛은 알 수 없는 열의가 담겨 있어서 특유의 거만함을 다소 상쇄시켜 주기도 했다. 그의 굳어진 표정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본래의, 무장이 해제된 표정에서 지금처럼 굳어지기 이전의 그를 상상할 수 있었다. 나는 그의 말투와 표정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그가 감사업무를 맡지 않았더라면 그의 표정이나 말투, 태도가 조금이나마 달라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좀 덜 억울했을텐데. 그러니까 그가 원래부터 그런 표정을 한 것은 아니라고 이해할 수 있었을텐데. 물론 그 업무를 맡은 모든 사람들이 그와 똑같은 표정과 말투를 지닌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그 사람이 가진 특유의 개성적인 표정일지도 모른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사람이 가진 표정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굳어지게 된 굳은살같은 표정에 대해서다. 내가 만약 내 일 때문에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지게 된다면, 나는 좀 억울할 것이고, 좀 슬플 것이다. 누군가 내 얼굴과 태도, 말투에서 내가 하는 일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면 말이다. 그것은 나는 어떤 사람이다, 라고 타인에 의해 쉽게 규정될 것이므로. 나는 좀 더 깊고 풍부한 표정을 지니고 싶다. 가능하다면 오래도록.

'어느푸른저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필요한 해프닝  (0) 2014.07.03
고양이  (0) 2014.06.27
다른 가능성  (0) 2014.06.24
신경을 쓰기 싫지만 쓰지 않을 수 없는 일  (0) 2014.06.20
내부의 안부  (0) 2014.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