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이름

시월의숲 2014. 7. 29. 23:10

내가 읽으려고 한 책들의 저자는 모두 시인이었다. 그러나 내가 읽으려고 한 책은 시집이 아니었다. 나는 그들의 시가 아니라 산문을 읽었고, 읽고자 했다.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삼십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 메이 사튼의 <혼자 산다는 것>,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 물론 그들 중에는 시를 쓴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은 하나의 거대한 산문시라고도 할 수 있으니, 딱히 시가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에게 그들은 시인이 아니라 그저 산문을 쓴 사람으로 기억될 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기운에 휩싸였는데, 그것은 그들의 산문을 읽고서 과연 그들을 다 읽었다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들이 가진 시인이라는 직함이, 내가 그들의 책을 읽으려고 할 때마다, 산문보다는 시를 우선적으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 것이다. 그것은 무언의 압박 같은 것으로, 그 누구의 강요도 아닌, 오로지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다는 점에서, 외부적이고 타의에 의한 압박과는 구분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 스스로를 어떤 틀 안에 가두는 행위와도 같았다. 산문을 쓴 사람들이 시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들의 시를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더구나 그것이 그들의 산문을 읽기 위해서라면, 나는 그들의 시를 영원히 읽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읽은 그들의 산문 또한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어떤 틀에 넣어 무언가를 규정하려 드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나 자신이 그러한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니! 나는 씁쓸함을 느꼈다. 느낄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아들 혹은 딸, 어느 지역 혹은 무슨 학교 출신, 남자 혹은 여자, 나이의 많고 적음, 종사하는 직업, 시인이나 소설가 등등.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우리를 규정한다. 우리는 우리의 내적인 관심사나 영혼의 색깔이나 향기에는 무심하다. 오로지 그를 규정짓는 것은 그가 지니고 있는 외부적인 것들뿐이다. 이것은 물론 비약적인 말일지도 모른다. 소설이나 시는 작가의 내부적인 정신작용에 의한 것이므로. 어쨌든 우리는 타인을 바라봐야 하고, 타인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하지만 그가 가진 이름이 그의 전부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타인을 한 가지 이름으로만 규정하려 한다. 한 가지 이름만으로 그를 평가하고 재단한다. 이름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오로지 그만이 가질 수 있는 개별적이고 은밀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그는 시인이라는 이름을 갖기 전에 글을 쓰는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또 이런 생각도 든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외부적으로 규정된 틀에 맞추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가. 우리는 시인 혹은 소설가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가. 시인이나 소설가라는 직함을 갖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보내는가. 나는 혼란스럽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늘 이런 식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나 자신은 그 무엇으로도 규정되기 싫고, 다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성취했을 때의 이름으로 불리고 싶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과는 분명 거리가 멀다. 그것은 좀 더 예술적인 것에 가깝고, 실용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며, 현실보다는 꿈에 더 기울어져 있다. 그래, 그것은 꿈인 것이다. 꿈을 규정할 수는 없으며, 꿈은 그 자체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가진다. 나는 꿈이 될 수 있을까. 꿈을 실현시킬 수 있을까. 나는 <자기 앞의 생>의 모모처럼, 내가 태어났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로서의 내가 되고 싶다.(20140728)

'어느푸른저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순간의 삶  (0) 2014.08.04
원래 그런 사람  (0) 2014.08.03
멀미  (0) 2014.07.26
어쩔 수 없는 것을 어쩔 수 없어 하기 위해  (0) 2014.07.25
독서라는 취미  (0) 2014.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