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타인들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를, 타인들도 나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를

시월의숲 2014. 10. 9. 17:05

나는 삶에게 극히 사소한 것만을 간청했다. 그런데 그 극히 사소한 소망들도 삶은 들어주지 않았다. 한 줄기의 햇살, 전원에서의 한순간, 아주 약간의 평안,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빵, 존재의 인식이 나에게 지나치게 짐이 되지 않기를, 타인들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를, 그리고 타인들도 나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를. 그런데 이 정도의 소망도 충족되지 못했다. 마치 어떤 사람이 마음이 약해서가 아니라 단지 외투의 단추를 풀고 지갑을 꺼내기 귀찮아서 거지에게 적선을 베풀지 않은 것처럼, 삶은 나를 그렇게 대했다.

 

적막에 잠긴 내 방에서, 슬픔으로 나는 글을 쓴다. 항상 그랬듯이 혼자이며, 앞으로도 항상 혼자일 것이다. 무의미할 것이 분명한 나의 목소리는 수천의 목소리의 본질을 담을 수 있을 것인가. 굶주림을 고백하는 수천의 목소리를, 내 영혼과 마찬가지로 일상이라는 운명에 굴종한 채 헛된 꿈과 영원히 실현되지 않을 희망을 차마 파기하지 못하고 있는 수백만 영혼의 끝없는 기다림을 담을 수 있을 것인가.(32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봄날의책,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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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을 읽고, 그것을 다시 읽으면서 타자로 치고, 이를테면 필사를 하고(물론 타자로 치는 것과 손으로 쓰는 것은 다를 것이다), 필사가 끝나면 다시 그것을 읽는다. 그러니까 나는 페소아의 글을 읽고, 쓰고, 다시 읽으면서 그것을 음미한다. 혹은 문장에 담긴 여러가지 감각과 생각을 천천히 곱씹는다. 되새김질한다.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다.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그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혹은 번역가가 의도하였거나, 그렇지 않았거나 간에, 문장안에 무의식적인 리듬이 내재되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알 수 없는 노래가 들리는 듯하다. 물론 그것은 완벽하게 구현된 노래가 아니다. 단지 허밍일 뿐이거나, 자신도 알 수 없이 중얼거리는 멜로디에 불과하다. 그래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것을 놓치기 쉽다. 그리고 한 번만 읽어서는 결코 알아채지 못한다. 불연속적인 멜로디와 단속적인 음이 그 안에 파편처럼 박혀있다. 나는 그것을 듣고, 그것을 느끼고, 그것을 본다. '항상 그랬듯이 혼자이며, 앞으로도 항상 혼자일 것'이라고 그는 썼다. 하지만 수백, 수천의 목소리의 본질을 담기를 원하고, 영혼의 끝없는 기다림을 담기를 그는 희망한다. 그러한 모순을 지닌 존재, 그가 페소아다. 타인들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타인들 또한 나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를. 그는 이 문장을 이미 오래전에 자신의 방에서 홀로 썼다. 슬픔에 잠긴 채. 나는 그 문장이 어쩐지 노래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