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나는 쓴다, 높은 산 위로 가라앉는 불가능한 노을의 색채를

시월의숲 2014. 10. 5. 20:59

부조리하고 앙상한 내 방 책상 앞에서, 이름 없고 하찮은 사무원인 나는 쓴다. 글은 내 영혼의 구원이다. 나는 멀리 솟아난 높은 산 위로 가라앉는 불가능한 노을의 색채를 묘사하며 나 자신을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내 석상으로, 삶의 희열을 대신해주는 보상으로, 그리고 내 사도의 손가락을 장식하는 체념의 반지로, 무아지경의 경멸이라는 변치 않는 보석으로 나에게 황금의 옷을 입힌다.(30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봄날의책,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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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영혼의 구원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자.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도 많은 글이 담긴 메모를 남길 수 있었는지 모른다. 높은 산 위로 가라앉는 노을을 묘사할 수 없음을 느끼면서, 좌절에 좌절을 거듭하면서, 그 좌절과 불가능성이 바로 자신의 글쓰기의 원동력임을 차갑게 깨달으면서.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는 결코 단 한 줄의 문장도 남기지 못했으리라. 삶의 부조리함과 불가능성에 잠식되어 아마도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그리하여 결국 그의 영혼은 구원될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그는 글로 인해 수십 개의 이름을 가진 영혼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가 수도 없이 자신의 이름을 바꿔가며 글을 쓴 이유를, 우리는 페소아 자신이 말한 '영혼의 구원'이라는 테마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불가능한 것을 묘사하는 부조리함. 그로 인해 황금빛으로 물드는 그, 페소아. 그는 일찌감치 어느 누구보다도 예리하고 섬세한 감각으로 삶의 부조리함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