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고요한 일상

시월의숲 2014. 10. 12. 21:29

몇 개의 음반과 책을 주문했고, 긴 팔 옷과 외투를 꺼내놓았다. 전기장판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며칠 전까지 열어놓았던 베란다의 창문을 닫았다. 어제 동생 내외가 왔다가 오늘 오전에 갔고, 동생이 가고 난 후, 나는 사택의 내 방으로 돌아와 일주일 동안 모아놓은 빨래를 돌리고, 걸레를 빨아 방바닥을 닦았다. 마트에 가서 바나나와 계란, 양파 등 식료품을 샀고, 음악을 틀어놓고 따뜻한 물에 샤워를 했다. 음악이 잘 들리진 않았지만, 그래도 간간히 주의를 기울이면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편안함을 느꼈다. 음악을 듣기 위해 샤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샤워를 하기 위해 음악이 필요했다. 샤워를 하고, 옷걸이에 널어놓은 빨래를 갰다. 빨래를 개면서 음악을 들었다. 가을이 되니까 음악이 더 잘 들리고, 그래서인지 더 듣고 싶어진다. 원래 음반보다는 책을 더 주문하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음반을 더 주문했다. 물론 즉흥적으로. 찬바람이 불면, 음악이 더욱 가슴 속에 파고드는 모양이다. 음악을 듣다 실증이 나면, 책을 읽었다. 미셸 슈나이더의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한꺼번에 많이 읽히지는 않는다. 오늘은 고작 대 여섯 페이지밖에 읽지 못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알 수 없는 글렌 굴드. 하지만 안개 속에 쌓인 것 같은 그를 어렴풋이 그려보는 재미가 있다. 오늘은 일요일. 나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느긋하게 하루를 보냈다. 나는 조용한 곳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오늘과 같은 일상을 사랑한다. 나는 가급적이면 오래도록 이 평화로움이 깨지지 않기를 바란다. 페소아가 말했듯, 타인들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타인들도 나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그런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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