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아름다운 날에 그랬던 것처럼

시월의숲 2014. 12. 6. 17:13

움직인다는 것은 산다는 것이다. 말 속에 스며든다는 것은 월등하게 산다는 것이다. 글로 묘사되는 삶이라고 하여 현실성이 희박하지는 않다. 속 좁은 비평가는 이렇게 강조하기를 좋아한다. 송가풍의 시들은 결국 삶은 아름답다는 결론 말고는 말해주는 것이 없다고. 그러나 삶의 아름다움을 말 속에 포착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아름다운 나날은 항상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새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름다운 나날을 풍요로운 어휘와 찬란한 기억 속에 저장해두었다가, 어느 날엔가 텅 비고 허무한 바깥세상의 공허한 들판과 하늘에 화사한 꽃과 별들을, 아름다운 날에 그랬던 것처럼 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64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봄날의 책,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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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묘사된 삶이 월등한 삶일 수 있음을. 글은 현실보다 오히려 더욱 현실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글 속의 삶이 더욱 아름다울 수도, 더욱 비참할 수도 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읽고 지나가는 글이, 어느 순간 가슴을 파고들어 깊은 인상을 남긴 적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는 지극히 상투적이고, 거칠며, 노골적인 글이었지만, 그러한 글조차 인간이 처한 어떤 특정한 순간에는 다른 어떤 글보다 호소력 있게 다가올 수도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페소아가 말하고 있는 것도 아마 그러한 것이 아닐까? '아름다운 나날을 풍요로운 어휘와 찬란한 기억 속에 저장해두었다가, 어느 날엔가 텅 비고 허무한 바깥세상의 공허한 들판과 하늘에 화사한 꽃과 별들을, 아름다운 날에 그랬던 것처럼 뿌려'줄 수 있음을. 그래서 누군가는 알 수 없는 위안을 받을 수도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