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문을 잠근다. 그리고 거기, 머문다

시월의숲 2014. 12. 24. 22:03

신앙이라는 망상을 피해 이성이라는 망상으로 달아나는 것은, 감옥을 바꾸며 수감되는 일에 불과하다. 우리를 낡아빠진 토착의 우상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예술은, 고결한 이상과 사회적인 고뇌로부터도 역시 해방시킨다. 그들 역시 또 다른 우상이기 때문이다.(78쪽, 페루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봄날의 책, 2014.)

 

 

*

나는 신앙이 없으며, 이성 또한 믿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때때로 기도를 하고, 감정에 치우치기 보다는 이성적인 인간이 되려고 노력한다. 페소아는 신앙과 이성을 똑같은 우상의 숭배로 보고 오직 예술이 그러한 낡아빠진 토착의 우상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예술지상주의자인가? 아니다. 그는 무신론자도, 계몽주의자도, 예술지상주의자도 아니다. 그는 우리를 규정짓는 모든 것들(무슨무슨주의자라고 쉽게 말하는 것들)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나또한 그 어떤 주의자도 되지 못한다. 그런 말 자체가 그 사람의 전부를 규정지어 버리는 것에 혐오감을 느낀다. 인간이 그렇게 단순한 존재던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 가지 확신하게 되는 것이 있다.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런 쓸모없는 존재라는 것. 예술은 그러한 인간의 쓸모없음의 표현이라는 것. 쓸모없음의 극대화된 형상이 바로 예술이라는 것. 그러므로 예술이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라는 것. 페소아가 혹 예술지상주의자처럼 보인다면 아마도 내 그러한 확신 때문이리라. 쓸모없음으로 우리는 깨어있을 수 있고, 모든 굴레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신앙이라는 혹은 이성이라는 감옥에 갇힌다. 문을 잠근다. 그리고 거기, 머문다. 우리는 모두 수감자다. 자신이 갇혔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발적인 수감자.

'불안의서(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장 소름 끼치는 진실  (0) 2015.01.05
누군가 길을 떠났다  (0) 2014.12.27
아름다운 날에 그랬던 것처럼  (0) 2014.12.06
고백  (0) 2014.11.03
거기, 문장들 사이로  (0) 2014.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