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모텔에서 하룻밤을

시월의숲 2014. 12. 7. 23:58

12일로 K시에 연수를 다녀왔다. K시는 지방에서는 꽤 인구가 많은 중소도시 중의 하나이지만, 나에게는 하얗거나 잿빛의 공장 건물들이 즐비한, 어딘지 모르게 차갑고 삭막한 이미지로 남아있다. 물론 내가 간 곳은 공단지역과 거리가 먼 곳이었지만, 그곳을 갈 때마다 지나쳐야 하는 공단의 이미지가 너무나 강하게 뇌리에 남아 있어서, 눈 내린 K시의 유명한 산의 풍경도 K시의 인상을 바꿔주지는 못한다. 또한 그 산으로 가는 길에 심어져 있는 봄날의 활짝 핀 벚나무 또한 공장지대의 이미지에 비하면 그리 깊은 인상을 주지는 못한다.

 

나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갈 생각이었으나, 시간이 맞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내 차를 이용한다. 새벽의 고속도로는 처음이다. 본격적으로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갑자기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기 시작한다. 나는 순간 난감한 기분에 휩싸였는데, 고속도로에서의 눈이란 생각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이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눈이 슬쩍 자취를 감춘다.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왔지만, 시내에서 목적지까지 찾아가는 시간이 더 걸린다. 나는 지각을 할까봐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시간 안에 목적지에 도착한다.

 

아는 사람들 몇 명과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커피를 마시고, 연수에 참석하고, 식사를 하고, 헤어진다. 다른 이들은 집에서 출퇴근을 하기 위해 서둘러 떠났지만, 나는 K시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한다. 오래 전에 나는 이곳에서 며칠 간 묵으며 연수를 받은 적이 있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모텔을 찾기 시작한다. 나는 조금 헤멘 끝에 예전에 내가 묵었던 그 모텔을 찾아낸다. 로망스 모텔. 처음에는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지만, 모텔의 이름을 본 순간 예전에 내가 묵었던 그 호텔임을 직감적으로 안다. 하지만 예전에 내가 이 모텔에서 받았던 인상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그때보다 더 허물어지고, 더 남루하며, 더 은밀한 느낌이 든다.

 

날씨가 춥고 주위가 어두워졌기 때문일까.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가 한 두 명씩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목도리나 마스크 등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남루함을 옷처럼 두른 사람들. 모자도, 목도리도 없는 나는 마치 벌거벗은 채 골목을 걷고 있는 것 같다. 눈만 내놓은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며 지나간다.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가방을 든 손이 시리다. 모텔에 들어가기 전, 저녁으로 먹을 김밥을 산다. 가방 두 개와 김밥 봉지를 들고 모텔로 향한다.

 

모텔에 들어서자마자 설명할 수 없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나는 결재를 하고 열쇠를 받아 방으로 간다. 냄새의 정체를 파악해보려 해도 도무지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다. 어쩌면 수십, 수백 개의 냄새가 오랜 시간 먼지와 함께 뭉쳐져서 모텔 구석구석 배였기 때문이리라. 나는 약간 후회감이 들었으나, 너무나 피곤했고, 후각은 오래 있으면 둔해지기 마련이라는 생각에 서둘러 방으로 향한다. 방문을 열자 또 다른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하지만 이번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다. 담배. 방 안에는 찌든 담배 냄새가 가득 고여 있다. 여름이었다면 창문이라도 열었을 텐데, 방 안은 창문을 열지 않더라도 충분히 추운 상태였고, 냄새 때문에 창문을 열었다간 얼어죽을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으므로 나는 창문을 열 엄두를 내지 못한다.

 

나는 텔레비전을 틀고, 의자에 앉아 김밥을 먹기 시작한다. 생각보다 김밥이 맛있어서 좀 놀란다.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침대 속으로 들어간다. 모든 것이 낡았다. 어쩌면 낡은 것이 아님에도 방안에 있는 모든 것이 낡아 보인다. 오래 전에 나는 이곳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기억나지 않는다. 읽으려고 가져온 책을 꺼낸다. <잠자는 남자와 일주일을>. 배수아의 신작 에세이다. 다행히 형광등이 생각보다 밝아서 책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읽지 못한다. 피곤해서인지, 알 수 없는 냄새의 압박감 때문인지,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래 전에, 나는 이곳이 아닌 다른 지역의 모텔에서 배수아의 <북쪽 거실>이라는 소설을 읽었다. 모텔에서의 하룻밤은 모종의 낯섦과 이방인의 느낌, 피곤, 현실과 잠의 경계가 흐려지는데, 그것은 배수아의 소설과 비슷한 면이 있다. 모텔에서 잘 때마다 배수아의 책을 읽은 것은 순전히 우연이지만, 어쩐지 나는 그 우연이 우연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신기하게도 내가 배수아의 책을 읽고 있는 동안, 혹은 배수아의 책을 읽으려고 할 때마다 어딘가로 출장 혹은 연수를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읽지 못하고 책을 덮는다. 불을 끈다. 어둠이 기다렸다는 듯 순식간에 밀려와 방 안을 점령한다. 모텔의 창문은 어떠한 빛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다. 어느새 나는 냄새를 자각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내가 있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파도에 휩쓸려온 유리병처럼, 어느 순간 내가 알 수 없는 힘에 휩쓸려 이곳까지 왔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몸을 움츠린다.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가? 나는 지금 회색의 차가운 시멘트벽으로 둘러싸인 공장지대에 누워있는 것인가? 사람들의 얼굴은 어둠 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나조차 나를 볼 수 없다. 나는 몸을 더욱 움츠린다. 어쩐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어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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