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회색 詩

시월의숲 2014. 12. 1.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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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12월이라는 것을 알리듯이, 오늘, 눈이, 왔다. 눈 때문에, 11월과 영원히 작별해버린듯 느껴진다. 작년에는 11월 말에 눈이 온 것 같은데. 어찌 되었든 12월이 되었고, 눈이 왔고, 추위가 들이닥쳤다. 내일은 한파주의보가 발령될 거라고 누군가 말했다. 내일 현장체험연수를 가기로 되어 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실 아무 상관 없는건지, 나는 가지 않게 되었다. 역시 앞일은 알 수 없다. 오늘은 모처럼 겨울다운 날씨였다. 그리고 내일은 좀 더 따뜻하게 입어야지, 생각했다. 따뜻한 차와, 따뜻한 이불, 따뜻한 눈빛과 따뜻한 손길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어쩌면 좀 어수선한 12월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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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둘은 얼핏 상반되게 보이면서도, 꽤 닮은 구석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정동진으로 가는 기차에서 처음 만난 그들은 나와 여행(이 아니라 워크숍이었지만)의 목적이 같았다. 그러니까 우리는 같은 목적지에 같은 목적으로 가는 것이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나는, 어색함이 가시지 않아 자연스레 말수가 줄어들었지만, 내 직장 동료와 아는 사이인 그들은 서로 즐겁게 이야기하며, 웃고, 장난을 쳤다. 둘 다 안경을 썼지만, 한 명은 굵은 뿔테 안경에 눈동자가 컸고, 한 명은 테가 까만 안경에 눈동자가 작았다. 눈이 큰 남자는 장난기가 많아, 웃기지도 않은 농담과 시답잖은 소리를 연신 하면서도 지칠줄을 몰랐고, 눈이 작은 남자는 눈이 큰 남자가 하는 말에 전혀 웃지 않고, 시종일관 심각한 표정에, 그와는 늘 반대의 의견을 표명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서로를 재료삼아 놀리는 만담꾼들처럼, 한 명이 말하면 다른 한 명이 받아치면서 시종일관 대화를 이어나갔다. 눈이 작은 남자가 일방적으로 놀림을 당했는데, 어떨 때는 짜증이 날만도 했지만, 그는 크게 화를 내지 않았다. 그가 화를 낼라치면, 눈이 큰 남자가 눈치빠르게 그를 달래면서 화를 풀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마치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개그 콤비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처음 만나는 나에게까지 장난을 쳤는데, 처음에는 흔쾌히 받아주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조금 짖궂긴 해도 재밌는 장난이라면 한 두 번쯤은 받아 줄수도 있건만, 그들은 '정도'를 모르는 것 같았다. 술을 마시자 더욱 심해지는 집요한 장난에 나는 기분이 상하고 말았다. 하지만 술 취한 사람에게 뭐라 하기도 그렇고, 보는 사람도 많고 해서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거리'라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술이 그 '거리'를 없애준다고, 혹은 뛰어넘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술이 모든 것의 목적이 되는 사람들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데, 그들이 딱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여행을 가든, 사람을 만나든, 제일 우선적인 목적이 바로 '술'이다. 술을 마시기 위해 여행을 가고, 사람을 만나고, 밥을 먹는다. 극단적으로 말하긴 했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부류의 사람이다. 그들은 아마도 내가 고리타분하고, 어리며, 인생을 모른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겐 아무런 공통의 화제가 없다. 우리는 만났지만, 결코 만나지 못한다. 우리는 같이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눴지만, 우리가 먹고, 마시며, 나눈 모든 것들은 그저 나 혼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을 모르고 그들 또한 나를 모른다. 우리는 만난 적이 없으므로. 나는 정동진을, 기차에서 바라본 풍경과, 바다로만 기억할 것이다. 내가 정동진을 다녀온 후, 알 수 없는 피로감에 시달렸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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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니, 갑자기 배수아의 단편 <회색 詩>가 생각난다. 지금, 단 한 줄의 문장도 생각나지 않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회색빛의 서늘한 번뜩임이 다시 되살아나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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