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정동진

시월의숲 2014. 11. 29. 15:58

 

정동진은 생각보다 포근했다. 어떤 기후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따뜻한 날씨에 조금 놀랐고, 생각보다 넓지 않은 모래사장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정동진을 지금의 정동진으로 있게 해 준, <모래시계>를 보지 못했으므로 나는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정동진을 보고 왔는지도 모른다. 떠들석했던 그 드라마가 아니었다면 이곳은 아마도 더 호젓하고, 고요하며, 비밀스러운,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장소가 되었으리라. 우리는 정동진에 우뚝 솟아있는 '썬 크루즈 호텔'에서 하루를 묵었다. 일정에 따라 미리 예매를 해 둔 기차표 때문에 강릉 시내를 돌아보지 못한 것은 약간 아쉬웠다. 호텔의 음식들과 객실은 평범했지만, 정갈하고 부담스럽지 않았다. 무엇보다 썬 크루즈 호텔의 최대 장점은 건물 자체에 있는 것 같았다. 배 모양으로 디자인 된 건물의 전체적인 외형이 일단 시선을 잡아 끌었고, 주변의 산책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호텔 자체가 언덕에 위치에 있어서 바다를 조망하기가 좋았다. 호텔에서 바라본 바다도 좋았지만, 그래도 정동진은 '기차 안에서 바라본 바다'가 우선이 아닐까 한다. 남쪽에서부터 출발하여  영주, 봉화, 태백을 거쳐 동해, 정동진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만나게 되는 풍경들,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목적은 이미 달성된 것이리라. 그렇게 산과 냇물을, 판자집과 폐허를, 안개와 삭막함과 남루함을 지나 도달한 바다에서 우리는 오해로 지치고 얼룩진 우리의 마음을 잠시 풀어놓는다. 파도에 눈을 씻는다. 하얀 포말에 손을 담근다. 그리고는 모래를 툭툭 털고 다시 일어서 기차를 탄다. 그것이 정동진 여행의 전부이다. 그런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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