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2014년 12월 어느 늦은 밤

시월의숲 2014. 12. 21. 12:15

며칠 전 직장 동료와 술을 마셨다. 그는 상당히 독특한 인상을 풍겼는데, 위계질서가 있는 조직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 중심에서 살짝 비켜있는듯 자유로워 보였고(혹은 그런 것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듯 보였고), 자신이 지금 해야하는 일만 생각하여 그것과 상관없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듯 행동하였으며, 자신만의 주관이 뚜렷하다 못해 좀 고집스러워 보였다. 그런 첫인상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그가 내게 술 한잔을 하자고 했을 때, 나는 당황했다기 보다는 좀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일을 하면서도 그와는 부서가 달라 잘 만날 수 없을 뿐더러, 만나는 일이 있다고 해도 일상적인 대화 말고는 다른 말은 거의 하지 않았고, 그 짧은 대화에서조차도 분명히 그와 나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사람을 어떤 틀에 넣어 해석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는 분명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고하게 구축하고 있었고, 그런 면에서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나만의 스타일과는 좀 어울리지 않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은 갑작스러운 한파에 얼떨떨한 날이었는데, 어쨌거나 우리는 삼겹살 삼 인분을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가게 안에는 사람들이 제법 들어차 있었다. 추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따뜻한 곳에 들어온 나는 뿌옇게 흐려진 안경을 벗어 쥐고, 흐리멍텅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삼겹살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내 예상대로 그와의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고, 단속적으로 이어졌다 끊어졌다를 반복했다. 하긴 그가 내게 술을 마시자고 한 이유가 같이 마실 사람을 구하지 못했고, 그와 내가 같은 사택에 있었으므로 집 근처의 술집에 가기도 좋았고, 무엇보다 그가 술을 무척 마시고 싶었기 때문에 상대가 굳이 내가 아니어도 상관없는 일이었으므로, '대화'가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터였다. 어쨌거나 목적은 '술'이었으니까.

 

그는 올해 초에 갑자기 무슨 계시처럼 술을 끊었는데, 어느 순간 몹시도 술이 생각날 때가 있다고 했다. 원래 소주를 마셨으나, 술을 끊고 몇 달 뒤, 술 생각이 간절하여 소주를 입에 댄 적이 있는데, 그 순간 소주의 맛이 너무도 역해서 도저히 마실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찾아낸 대안이 막걸리였다. 나는 삼겹살에 막걸리를 한 모금씩 마시며 그가 하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가 술을 끊었다고 하면서 종종 막걸리를 마신다는 말에, 그건 술을 '끊은' 것이 아니지 않느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나는 그가 올해 초에 불현듯 '이렇게 쓰레기처럼 살지 말아야지'하면서 술을 끊게 만들었던 그 '결심'이 대단하다고 말했고, 그 결심을 위해 한 잔 하자고 말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대학 생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책하고는 거리가 멀 것 같은 그가 대학시절 정말 많은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전공은 기계공학과였는데 어떻게 문학을, 더구나 우리나라 7, 80년대의 굵직한 한국 리얼리즘 소설을 많이 읽을 수 있었는지 의아하고 놀라웠다. 나는 내가, 나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구나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대학시절 선배들이 항상 책을 많이 읽으라고 말했으며, 그 시절에는 책을 읽지 않으면 대화를 할 수 없었다고도 말했다. 나는 내 대학시절과는 무척 다른 분위기의 대학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그를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이후로 우리는 책에 대해서, 작가에 대해서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했으며, 의외로 우리가 어떤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흥분했다. 물론 우리가 어떤 시절에 대해서, 책이나 작가에 대해서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하지는 못했지만(그럴 능력도 없었지만), 어쨌거나 우리가 공통의 책을 읽었다는 사실에서 오는 모종의 유대감은, 내가 그에게서 가지고 있었던 선입견을 불식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의외로 책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과 그렇기 때문에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더욱 즐겁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언젠가 우리가 서로 읽지 않은 어떤 책을 읽고 이야기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긴 채 가게를 나왔다. 그는 취했고 나는 취하지 않았다. 눈이 와서 얼어버린 길을 서로 부축하며 걸었다. 사실 나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었다면 재미가 없었으리라. 전혀 다를 것 같은 두 사람이 공통의 화제를 찾았을 때, 그 기쁨은 두 배가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번에 나는 취하지 않았지만, 만약 다음 번에 만난다면 어쩐지 취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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