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이미 너무 많은 계절을

시월의숲 2015. 3. 17. 23:54

며칠 몸이 아파서 그런가, 시간이 아주 더디게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면 어느새 저녁, 하루, 일주일이 지나가 있지만, 단 하루가 무척 느릿한 걸음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아서, 내 아픈 몸이 더욱 오래 아픈 것처럼 생각되었다. 고작 며칠이지만, 그 며칠이 때론, 몇 달, 혹은 몇 년을 살아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 몸이 아프니 마음이 아파왔다. 문제는 그것이었다. 마음이 아프니, 주위의 모든 사람들과 사물들이 나를 배척하는 것 같고, 내게 악의를 품고 나를 모함하거나 업신여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게 주어진 일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의 음모처럼 느껴져서 화가 났다. 모두들 내게 불합리한 일만 강요하고, 감당하지 못할 일을 떠넘기며 내가 어떻게 하고 있나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자, 굴어온 돌이었고, 언젠가 떠나게 될 이방인에 지나지 않았다. 업무 시간에도 업무에 집중이 되지 않았지만, 쉬는 시간에도 온통 업무에 대한 생각 때문에 편히 쉬지를 못했다. 편히 쉬지 못한 것. 어쩌면 그것이 내 병의 최대 원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주말에도, 퇴근하고 나서도 늘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야근을 했지만, 그저 시간만 죽이는 형국이었다. 업무 능률도 오르지 않고, 무슨 일을 해야할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멍하게, 시간만 떼우고 있었다. 업무에 대한 알 수 없는 스트레스와 피해망상 때문에 나는 급격하게 말수가 줄어들었다. 전처럼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눌 정신이 없었다. 왜 나에게만 이런 형벌을 내리는가.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가. 이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내가 제정신이 아님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나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거나, 내 연기가 아직까지는 그럭저럭 봐줄만했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어느 누구의 아픔에도 관심이 없다. 우리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아픔에만 관심이 있고, 그리하여 온전히 그것만을 아파하고 안타까워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아픔밖에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의 아픔조차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단지 감기 때문에, 몸이 아프기 때문에 마음이 아픈 것인지, 마음이 아파서 몸이 아픈 것인지 구분할 수 있을까? 실은 나는 지금 아무것도 하기가 싫은 것이 아닌가? 오직 그 이유 때문에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모든 것이 계절이 바뀌는 탓이라고만 한다면, 나는 이미 너무나 많은 계절을 지나오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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