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당신의 조각

시월의숲 2015. 3. 16. 21:36

나 자신 이제 막 폭격을 당한 사람처럼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계속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정확하게는 계속 뭔가를 잘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신경쇠약을 겪고 있었고, 사실상 조각조각 나고 있었다. 정말 말 그대로였다. 모든 것이 흩어지고 파편이 되었다. 집중을 할수가 없었다. 하루하루가 수백만 조각으로 쪼개졌다. 하루는 24시간이 아니라 86,400초였다. 그런 시간마저 순서대로(그러니까 글자 한 자 한 자가 쌓여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듯이) 흐르지 않았고, 그 결과 무언가를 마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은 또 없었다. 나의 일과는 절대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충동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열 시간이 있어도 무언가를 마치기에는 부족했다. 열 시간이 실제로 열 시간이 아니라 수억 개의 시간 조각, 뭘 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 조각들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 방 저 방 오가며 각 방에 있는 시계들이 모두 같은 시각을 가리키고 있는지 확인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주방에서 침실로 가는 사이에 거실과 서재에 들렀던 시간을 계산하지 않은 바람에 처음부터 다시 한 바퀴 돌아야 했던 적도 있다. 동물들이 무리지어 도망갈 때처럼 머릿속이 엉망이었는데, 어쩌면 그보다 더 나빴다고 할 수 있다. 동물들이 도망을 갈 때는 적어도 한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온갖 것들이 온갖 방향으로 정신없이 옮겨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혼돈이론, 빅뱅, 엔트로피. 이 모든 물리학과 화학의 기본 원리들인지 뭔지가 항상 머릿속에서 진행 중이었다. 아주 조그만 좌절에도 나는 앞이 보이지 않는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공황 발작이 일어나지 않은 건 늘 발작 상태였기 때문이다. 내가 집중을 못 하는 게 아니었다. 집중과는 반대되는 어떤 힘이 나를 꼭 쥐고는 마치 원심분리기에 집어넣은 것처럼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나를 흩어놓았다.(251~252쪽, 제프 다이어,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 웅진지식하우스, 2014.)



*

요며칠 내가 그러했다.

모든 것이 흩어지고 파편이 된 상태. 도무지 집중을 할 수 없는 상태 말이다. 지금도 별반 나아진 것은 없지만, 제프 다이어의 글을 옮길만큼의 집중력은 그나마 생긴 것인지. 머릿속에 생겨난 말들이 질서정연하게 나오지 않고, 뒤죽박죽 섞여 나왔다. 내가 하는 말을 나조차 알아들을 수 없었다. 생각과 말이 엇갈리자, 내 몸의 무언가가 분리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당혹스러움과 나른함, 알 수 없는 흥분과 피곤이 온종일 내 몸 속에서 티격태격했다. 내 몸이 나를 움직이는 것인지, 다른 무언가가 나를 움직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내 몸과 마음이 서로 분리되어 싸우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주말에 있었던 모임 때문이었을까? 그 전에 이미 몸 상태가 안좋았지만, 그 모임으로 인해 더 악화된 것이 사실이다. 그리 내키지 않은 모임에 가기 위해 바쁜 업무에도 불구하고 조퇴까지 하며 참석을 했건만, 지금 생각하면 가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 내 몸을 내가 과신한 것이다. 아픈데도 불구하고 마신 몇 잔의 술 때문에, 나는 그날 호되게 앓아야 했다. 그 여파로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약은 근본적으로 치료를 한다기 보다는 아픔을 잠시 누그러뜨리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약효가 떨어지면 다시 아팠고, 약을 먹으면 잠시 나았다가 다시 아프기를 반복했다. 지금은 약효과 때문에 잠시 나아진 틈을 타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또다시 깊은 밤이 되면 나는 아플 것이다. 이 아픔의 예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제프 다이어는 저 조각조각 난 상태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을까? 계속 읽다 보면 알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직까지 저 페이지 이후로 넘어가지 못했다. 집중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글자 한 자 한 자가 개별적인 뜻을 가진(혹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음절의 나열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책 속에 담긴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쨌거나 제프 다이어는 글을 완성했고, 나는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그의 책을 끝까지 읽을 거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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