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피는 것이 꽃의 일이라면

시월의숲 2015. 3. 29. 16:49

하늘은 뿌옇게 흐리지만 햇살이 따뜻한 날이다. 따뜻해진 날씨 때문에 봄이 오고 있는 줄은 알았지만, 그래서 어딘가에는 꽃이 피고 있는 줄도 알았지만, 그것을 실제로 느끼지 못하고 그저 생각만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오늘 깨달았다. 그러니까 지금 내 주위에서도 꽃이 열심히 피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 것이다. 출퇴근 길에도 있었지만, 미처 보지 못한 개나리와 진달래, 목련이 수줍게 피어 있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저들은 자신들의 일을 묵묵히 하고 있건만, 나는 꽃이 피는 것도 모르고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는 생각에 뭔가 억울한 마음마저 들었다. 꽃이 저리 피는 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오랜만에 느낀 봄의 풍경 때문인지, 따뜻해진 기온에 마음이 풀려서인지, 아직 마시지도 못한 커피를 엎질러 버렸고, 걷다가 갑자기 다리가 풀려 휘청거렸으며, 국수를 먹다가 국물을 흘리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런 내게 긴장이 풀려서 그런 것이라고 말했고, 나는 정말 그런가 생각했다. 읽으려고 가져간 책을 한 장도 펼쳐보지 못했고(아니, 아예 꺼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그저 냇가를 따라 천천히 걷기만 했다. 하얀 목련을 몇 번이나 쳐다보았으며, 노란 개나리와 분홍빛의 진달래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반팔옷에 반바지를 입은 사람을 보았고, 자전거를 타고 햇살을 가로질러 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나는 걷고 있으면서도 꿈을 꾸고 있는듯 몽롱한 상태에 빠져들었다. 아무데나 누워서 자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예전보다 부쩍 잠이 늘어난 느낌이 들었는데, 깨어있는 순간에도 잠에 빠지고 싶은 충동이 시시때때로 찾아왔으므로, 난감한 기분에 휩싸일 때가 많았다. 꽃은 피고, 나는 피고 있는 꽃 속으로 들어가 자고 싶었다. 아니, 그 옆에서라도 잠들 수 있다면 나는 꿈 없는 잠을 잘 수 있으리라.


또 한차례 벚꽃이 피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까지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해야 열심히 사는 것일까? 피는 것이 꽃의 일이라면,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김연수라면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고.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피는 것이 꽃의 일이라면, 그 꽃을 바라보는 일은 내 일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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