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메아리와 심연

시월의숲 2015. 3. 21. 23:28

사고하면서 나는 스스로를 메아리와 심연으로 만들었다. 나를 더욱 깊게 만듦으로써, 나를 더욱 다층화했다. 가장 사소한 사건들, 빛의 작은 변화, 돌돌 말리며 떨어지는 마른 잎새, 시들어버린 꽃이파리, 성벽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혹은 발걸음이, 그것에 귀 기울이는 자의 발걸음과 연합을 이룬다. 그리고 낡은 농장의 반쯤 열려 있는 문, 달빛 아래 모여 있는 집들의 아치문을 통해 보이는 안뜰, 나에게 속하지 않은 이 모두가 내 예민한 사색을 사로잡아 반항과 그리움의 사슬로 결박한다. 이런 감각 하나하나를 느낄 때마다 나는 매번 다른 사람이 된다. 매번 달라지는 불특정한 인상으로 나를 고통스럽게 갱신한다.(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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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실은 매일이 다르다. 어제의 노을이 오늘과 같지 않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지 않다. 우리가 반복되는 일상에 쉽게 지치는 것은 우리의 느낌이 하루의 미세한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더욱 깊게 만들지 못하고, 다층화하지 못하며, 매번 다른 사람으로 갱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고해야 하는가? 어떻게 스스로를 메아리와 심연으로 만들 수 있는가? 어떻게 매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가? 페소아는 저 문장에 이어서 이렇게 썼다. "나는 내 것이 아닌 인상으로 살아간다. 나는 체념을 남용하는 자이고, 내가 나로 존재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매번 다른 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