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무한의 사막과 우주적인 잠

시월의숲 2015. 2. 8. 20:12

  현실을 환상의 한 종류로 받아들이고 환상을 현실의 한 종류로 받아들이기. 이것은 쓸데없는 일이면서 동시에 불가피한 일이다. 관조적인 삶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선 삶의 실제 사건들을 도달하지 못할 결과의 산발적인 전제로 간주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관조적인 삶은 반드시 실제적이지는 않은 꿈의 성격에도 모종의 관심을 기울여야만 한다. 우리가 꿈에 대해서 갖는 관심 자체가 바로 우리를 명상적인 인간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은 그것을 관찰하는 방식에 따라 기적이 될 수도 있고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모든 것이 될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방법이 될 수도 있고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사물을 항상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사물을 새롭게 갱신한다는 것이며 다층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조적인 인간은 자신이 사는 마을을 한번도 떠나지 않고서도 전체 우주를 손안에 둘 수 있다. 하나의 세포 안에 무한이 사막처럼 펼쳐진다. 하나의 돌 위에서 우주적인 잠에 빠져든다.(175,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봄날의책,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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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조적인 삶이란 어떤 삶일까. 현실을 환상으로, 환상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무한의 사막이 펼쳐지고 우주적인 잠에 빠져드는 삶이란.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모르기 때문에 표현할 수 없었다. 그저 막연한 느낌, 인상, 기분, 예감만을 가진 채 살아왔다. 페소아는 그런 내 막연한 느낌에 형체를 부여한다. 예전부터 느껴왔으나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 늘 답답하고 망설이기만 했던 것들을. 하지만 나는 확신하지는 못한다. 내가 원한 삶도 페소아가 말하는 관조적인 삶에 근접한 것 같지만, 그것을 관조적인 삶이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있는 것인지. 페소아의 글은 불확실하고 모호한듯하지만, 다층적이고 개별적인 느낌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나는 상반되는 두 가지 느낌이 주는 묘한 울림을 사랑한다. 모든 사물이 지닌 기적과 장애물, 방법과 문제,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을. 하나의 세포 안에 펼쳐지는 무한의 사막과, 하나의 돌 위에서 빠져드는 우주적인 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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