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불완전한 방식으로 존재하기 위하여, 그리고 불완전한 이 존재를 소유하기 위하여

시월의숲 2015. 3. 26. 23:48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존재가 된다는 의미다. 어제 느낀 것처럼 오늘도 똑같이 느낀다면, 그것은 느낌이 불가능해졌다는 의미다. 어제처럼 오늘도 같은 느낌이라면, 그것은 느낀 것이 아니라 어제 느꼈던 것을 오늘 기억해낸 것이며, 어제는 살아 있었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은 것의 살아 있는 시체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하루의 모든 내용을 칠판에서 지워내는 일, 매일 새롭게 시작하는 아침을 사는 일, 우리 감정의 처녀성을 반복해서 부활시키는 일, 그것이, 오직 그것만이 존재와 소유의 가치가 있다. 우리가 불완전한 방식으로 존재하기 위하여, 그리고 불완전한 이 존재를 소유하기 위하여.

  지금 밝아오는 이 아침은 이 세상 최초의 아침이다. 따스한 흰빛 속으로 창백하게 스며드는 이 분홍빛은, 지금껏 단 한번도 서쪽의 집들을 향해서 비춘 적이 없었다. 집들의 유리창은 무수한 눈동자가 되어, 점점 떠오르는 햇빛과 함께 퍼져가는 침묵을 지켜본다. 이런 시간은 지금껏 단 한번도 없었다. 이런 빛도 없었으며, 지금 이러한 내 존재도 아직 한번도 없었다. 내일 있게 될 것은 오늘과 다를 것이며, 오늘과 다른 새로운 시선으로 채워진 눈동자가 내일 내가 보는 것을 자신 속에 담아낼 것이다.(185쪽)



*

그렇다.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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