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간다

나는 <레드 드래곤>을 보았는가

시월의숲 2015. 5. 30. 22:23


내가 그 영화를 보았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양들의 침묵>이나 <한니발>, <한니발 라이징>까지, 한니발이 나오는 영화는 는 모두 본 기억이 있지만, <레드 드레곤>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그 영화를 50분 정도까지 보았을 때, 언젠가 내가 이 영화를 보았을거라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 의심은 영화 속 레바 맥클레인역을 맡은 에밀리 왓슨이 나왔을 때 확신으로 바뀌었다. 나는 이 영화를 오래 전에 이미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에밀리 왓슨이 나오는 장면을 보고도 그녀가 이 영화에서 시각장애인으로 나왔었는지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를 이미 보았지만, 이번에 처음 보았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영화를 절반 가까이 보고 나서야 내가 이 영화를 보았다는 생각만 겨우 해냈을 뿐, 영화의 내용을 전혀 기억해내지 못했으니.


<레드 드레곤>은 내용상으로 보면 <양들의 침묵> 전편에 해당된다. <양들의 침묵>에서 감옥에 갇힌 한니발 박사가 어떻게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지 나오니까 말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이 내용의 전부는 아니다. <레드 드래곤>은 <양들의 침묵>의 플롯을 그대로 가져와 복제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영화 초반에 한니발은 이미 주인공에 의해 감옥에 갇히니까 말이다. 그 이후의 내용은 <양들의 침묵>과 같다. 그래서인지 맥이 좀 빠지는 느낌이 들었고, 스릴과 서스펜스는 <양들의 침묵>을 따라가지 못했다. 나는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한니발(앤서니 홉킨스)과 윌 그래험(에드워드 노튼)의 대결에 더욱 중점을 두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초반에 한니발을 가둬넣지 말고 말이다. 어쩌면 <양들의 침묵>을 뛰어넘기를 바란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양들의 침묵>과 비교하지 않는다면 <레드 드래곤>은 나름대로 괜찮은 영화였을수도 있겠지만, 어떻하나, 비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영화를 보면서 그 영화를 보았다는 사실을 겨우 기억해내는 안타까움에 대해서 말했는데, 사실 영화를 보았다는 걸 알면서도 영화의 줄거리나 장면이 기억나지 않는 경우도 많다(아니, 거의 대부분의 영화가 그러하지 않은가?). 그것은 너무 오래 전에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보고 나서 별 인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며, 어쩌면 한 번만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책이나 그림, 풍경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내가 보고 읽은 것은 다 무엇이었나? 내가 본 것들을 다 기억해야 하는 것도, 기억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어떤 영화를 보았다는 사실조차 기억해내지 못한다는 건 좀 슬픈 일이 아닌가. 어찌 되었든 이번 기회로 인해 <레드 드래곤>을 보았다는 사실을 잊지는 않을 것 같다. 물론 확신할 수는 없지만.



*

듀나의 <가능한 꿈의 공간들>을 읽다보니 내가 위에서 쓴 것과 비슷한 주제의 글이 있어서 일부분을 옮기고자 한다. 물론 여기서 듀나가 말하는 건 내가 위에서 말한 것과 성격이 다르긴 하다. 나는 이미 본 영화이지만, 그것을 보았다는 사실조차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후에 영화를 보면서 생각해낸 것)에 대해 이야기했고, 듀나는 그 영화에 대한 사전 지식(혹은 영화 주변적인 것에 대한 기억)이 너무 많아서 영화를 이미 본 것처럼 생각되는, 그래서 정확히 그 영화를 보았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하지만 내가 과연 그 영화를 보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해서라면 비슷한 상황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이야기를 너무 진지하게 발전시킬 생각은 없다. 일단 남들이 이미 했고, 내가 기억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당시의 경험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은 들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삶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순간들에 의해 지탱된다. 내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실이 달라지지도 않는다. 지금의 내 기억은 나를 정의하지 못한다. 어차피 나는 이후에도 수많은 것들을 잊고 다시 기억할 것이다.(139쪽, 듀나, 『가능한 꿈의 공간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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