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불가피한 독

시월의숲 2015. 6. 5. 22:42

나에게 글쓰기는 자기경멸이다. 하지만 나는 글쓰기를 놓지 않는다. 나에게 글쓰기는 혐오하면서도 끊을 수 없는 마약과 같다. 경멸하면서도 발을 빼지 못하는 악덕과 같다. 불가피한 독이 있다. 글쓰기는 미묘한 삶의 유형이다. 영혼의 성분, 꿈의 숨겨진 폐허에서 채취한 약초, 생각의 무덤에서 꺾어온 검은 양귀비꽃, 저승의 강변에서 요란하게 가지를 흔드는 음란한 나무의 길쭉한 잎사귀들로 이루어진.

그렇다. 글쓰기는 나에게 상실이다. 하지만 상실 아닌 것은 없다. 잃는 것은 모두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기쁨 없이 잃는다. 익명의 시냇물로 태어나 강어귀에서 바다로 합쳐지는 강물과 달리, 나는 파도가 남기고 간 해변의 물웅덩이처럼 모래 속으로 사라져 갈 뿐 결코 바다로 되돌아가지는 않는다.(278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봄날의 책, 2014.)

 

 

 

*

어쩔 수 없는 것. 나는 늘 그것에 대해서 생각했고, 그것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확신에 찬 생각의 이면에 체념의 정서가 묻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너무 일찍 단념해버리는 나약함이, 내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하면 할수록 더 드러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나는 사실 확신하지 못한다. 차라리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한 확신은,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나를 지배했다. 이것은 모두 내가 나약하기 때문이며, 확신에 찬 내 목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오히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외침에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하지만 확신의 있고 없음, 강함과 약함을 떠나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은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페소아의 표현대로 '혐오하면서도 끊을 수 없는 마약'이자 '경멸하면서도 발을 빼지 못하는 악덕', '불가피한 독'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파도가 남기고 간 해변의 물웅덩이'처럼, 바다에서 비롯되었지만 결코 바다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인간들 자체가 상실의 운명을 타고난, 어쩔 수 없는 존재들일 뿐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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