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가장 덜 부조리한 종류의 꿈

시월의숲 2015. 6. 20. 14:11

불가해한 것을 꿈꾸고 그것을 명확히 언어화하는 것은, 그 분야에 능통한 나조차 흔하게 겪지 못하는 위대한 승리 중의 하나다. 그렇다. 예를 들어서 나는 동시에, 각각 별개이며 뒤섞이지 않는 방식으로, 어느 강변에서 산책하고 있는 남자이자 동시에 그와 동행하는 여자가 되는 것을 꿈꾼다. 동시에, 똑같은 선명함으로, 똑같은 방식으로, 따로따로 개별적으로 있는 나를 보기 원한다. 두 존재에 똑같이 감정이입할 수 있기를 원한다. 남쪽 바다를 향해하는 의식을 지닌 배이자 동시에 어느 책의 한 페이지가 되기를 원한다. 얼마나 부조리할 것인가!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부조리하다. 그 꿈은 차라리 가장 덜 부조리한 종류에 속하리라.(286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봄날의책, 2014.)


*

그것은 부조리하다기 보다는 불가능해 보인다. 내가 나 조차도 확실히 알지 못하는데, 동시에 타인에게 감정이입할 수 있기를 바라는 꿈은. 그것은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이 또한 페소아가 꾸는 꿈일 뿐인가.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한번쯤 타인의 감정을 느껴보고 싶다. 누군가의 삶에 미끄러져 들어가보고 싶다. 그리하여 내가 아닌 타인 또한 감정이 있고, 그것을 느끼고, 생각하고, 자신만의 꿈을 꾼다는 것을 몸소 체험해보고 싶다. 나는 나라는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다. 아무리해도 너를, 당신을, 당신들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또한 페소아처럼 그렇게 소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타인의 의식 속으로, 삶 속으로 들어가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나를 버리지 않는 이상 타인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너로 변하지 않는 이상 내가 너를, 너의 감정을 정확하게 알 수 있을까. '똑같은 선명함으로, 똑같은 방식으로, 개별적으로 있는' 나와 너를 볼 수 있을까. 내가 나인채로 너를 이해할 수 있을까. 만약 내가 아닌채로 너를 느끼고, 너 자신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내가 나라는 '의식'은 그래서 중요한 것인가. '남쪽 바다를 향해하는 의식을 지닌 배이자 동시에 어느 책의 한 페이지가 되기를' 원하는. 그것이 페소아가 말하는 부조리인 것일까. 그렇다면 나또한 이렇게 말해야만 하리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부조리하다. 그 꿈은 차라리 가장 덜 부조리한 종류에 속'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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