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나는 오직 아프며, 나는 오직 꿈꾼다

시월의숲 2015. 5. 30. 16:40

나는 분노하지 않는다. 분노는 강한 자들의 일이다. 나는 좌절하지 않는다. 좌절은 고귀한 자들의 일이다. 나는 침묵하지 않는다. 침묵은 위대한 자들의 일이다. 나는 강하지도 않고 고귀하지도 않으며 위대하지도 않다. 나는 오직 아프며, 나는 오직 꿈꾼다. 나는 약하기 때문에 비탄에 잠긴다. 또한 나는 예술가이기 때문에, 내 비탄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을 기쁘게 듣는다. 나는 예술가이기 때문에 아름답게, 내 상상의 세계와 가장 밀접한 형태가 되도록 꿈을 꾼다.(236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봄날의책,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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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직 아프며, 나는 오직 꿈꾼다.' 이 말에 페소아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닌가. 그가 쓰는 모든 것들, 그것은 바로 그의 아픔의 결과이며, 꿈을 꾼 결과가 아닌가. 그는 현실을 꿈으로 만들어버리고, 그 꿈 속에서 산다. 그리고 그것을 글로 쓴다. 그의 글쓰는 행위는 꿈을 꾸는 행위와 같다. 누군가 말하리라. 그것은 현실을 외면한 채 뜬구름만 잡는 일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살기 위한 지극히 페소아적인 노력의 결과이다. 그는 강하지도, 고귀하지도, 위대하지도 않다. 그것은 나또한 마찬가지다. '나는 약하기 때문에 비탄에 잠긴다.' 내가 페소아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내가 예술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예술가는 아니지만, 내 비탄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을 기쁘게 듣는다. 또한 내 상상의 세계와 가장 밀접한 형태가 되도록 꿈을 꾼다. 나는 예술가는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예술가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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