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더이상 당신을 만만하게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시월의숲 2015. 6. 24. 20:59

그는 왜 K에게만 유독 가혹해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그가 하는 말, 하는 행동 하나까지도 그냥 넘기지 못하고 꼭 한 마디씩 해야만 하는지. 그는 그런 K를 자신이 좋아하는게 아닌가, 좋아하기 때문에 오히려 상대방에게 잘보이기 위해 공격적인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왜, 좋아하는 사람의 관심을 끌기 위하여 부드럽고 듣기 좋은 말을 하기 보다는 거칠고 인신공격적인 말을 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K를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K가 하는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서슴없이 침범해 들어오는 저돌성에 몸서리를 쳤고, 순간순간 드러나는 이기주의적인 면모에는 욕지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좋아한다니! 그건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반대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K를 싫어하는 것일까? 그럼 왜 그는 K를 싫어하는가? 좋아하는 이유를 딱 꼬집어 이야기할 수 없듯이 싫어하는 이유 또한 그렇기 때문인가? 그는 혼란스러웠다. 무엇이 그를 K만 보면 공격적인 말들을 서슴없이 내뱉게 하는 것인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는 K를 시기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K를 향한 어떤 부러움 때문에? 그는 평소에 K를 자신의 욕망이 이끄는대로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거칠것 없고, 누구보다 자신의 실속을 잘 챙긴다고. 하지만 그는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부러워하는 것도 아니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생각의 방향을 자기 자신에게로 틀었다. 자신이 왜 그런 부류의 사람에게만 유독 거칠어질 수밖에 없는지를 자신의 과거에서 찾으려고 한 것이다. 그는 과거에 자신이 겪었던 가족들과의 기억들을 하나씩 되짚어 보았는데, 왜 자신이 가정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그가 아무 생각없이 K앞에서 그의 행동을 비꼬는 말을 하자, K가 화가 난 음성으로 말했던 것이다. "선배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가정교육을 못받았구만." 그는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조금 언짢았는데, 가정교육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K가 하는 말이 결국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상하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은데 왜 유독 K에게만 가정교육을 받지 못한 티를 내고야 말았는지 말이다. 그는 또다른 혼란 속으로 빠져들지 않기 위해 거기서 생각을 멈췄다. 그것이 부러움이든 무엇이든 간에 더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아직 사람들을 대하는 것에 서툴고,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자신 안에 고인 말이 자신를 벗어나 타인에게 갔을 때의 반향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너무 다가가면 안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은 것이다.(왜 매번 알면서도 당하고나서야 다시 알게 되는 것일까?) 그는 K의 눈빛을 기억했다. K가 말했다. "앞으로 말 조심해." 그 순간 그는 자신 안의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가 확실히 파괴되었음을. 그는 조금 슬픈 기분에 휩싸였지만,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인연이란 없다. K와의 시간도 멀리서 보면 정말 찰나의 순간일 뿐이어서 나중에는 기억조차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화를 내거나, 기뻐하거나, 슬퍼하거나, 아쉬워하거나, 부러워할 것이 무엇인가. 그런 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나 김연수는 말하겠지. 고독하고도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만나는 일의 기적과 소중함에 대해서. 하지만 그건 고독하고 유한한 존재인 인간을 잠시 위로하기 위한 사탕발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고독과 유한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인연은 무의미할 뿐이다. 고통이란 바로 인간들과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므로. 한 번 부서진 것은 다시 부서지기 전으로 되돌릴 수 없다. 한 번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한 번 뿐인 인생을 아무런 소중함 없이, 아무런 기대 없이 살아가야만 한다. 그럴 수밖에 없으므로.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더이상 K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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