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믿을 수 없는 일

시월의숲 2015. 6. 8. 00:07

언젠가 '믿을 수 없는 일'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던 것 같다. 이 한 줄의 문장을 써놓고 잠시 내가 쓴 과거의 글을 뒤졌다. 찾아보니 '믿을 수 없이 치명적인'이라는 제목으로 2009년 봄에 쓴 짧막한 글이 있었다. 2009년도 봄이면 내가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채 일 년이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마침 신종 플루가 발생하여 전국이 한동안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내가 그때 쓴 글은, 언제나 그랬듯 일상 생활의 피로함을 토로하며, 화창한 봄날에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바이러스가 창궐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뭐 그런 내용의 글이었다. 나는 일종의 기시감을 느끼며 내가 쓴 글을 바라보았다. 아니, 사실 기시감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일을 언젠가 경험해 본 것처럼 느끼는 것을 말하는데, 올해 창궐하고 있는 메르스는 이름만 다를 뿐, 신종 플루와 거의 같은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에 그와 비슷한 상황을 이미 겪었다. 마치 과거가 되풀이되듯이, 나는 지금, 그때의 악몽을 또다시 꾸고 있는 것만 같다.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들이 지금도 똑같이 느껴진다는 사실은, 그래서 내가 지금 그 감정에 대해 쓰기 위해 과거의 글을 뒤졌을 때,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고스란히 쓰여져 있는 지금의 내 감정을 바라볼 때의 그 느낌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믿을 수 없이 치명적인 시간과 공간을 넘어, 또한 믿을 수 없이 화창한 햇살 아래 창궐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하지만 나는 안다. 세상엔 내가 믿을 수 있는 것보다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더 많음을. 그래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믿을 수밖에 없는 일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과거로부터 배우지 않고, 늘 한 발 늦으며, 그래서 우리들의 과오는 되풀이된다. 믿을 수 없지만 믿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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