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시간은 불확실하며, 하늘은 멀기만 하고, 인생은 언제나 낯설기 때문에

시월의숲 2015. 8. 8. 15:49

인간은 아이 같은 본능이 있기 때문에, 설사 우리 중 가장 자존심이 드높은 자라고 할지라도 그가 인간이고 미치광이가 아닌 이상, 오 자비로우신 신이여! 세상의 비밀과 혼돈을 헤치고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이끌어줄 부성적인 손길을 그리워하게 된다. 우리 모두는 삶의 바람이 한번 휘몰아치면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다시 땅바닥에 내려앉는 먼지나 다름없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단단한 지지대, 우리의 작은 손을 편안히 맡길 수 있는 어떤 다른 손을 간절히 바란다. 시간은 불확실하며, 하늘은 멀기만 하고, 인생은 언제나 낯설기 때문이다.(321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봄날의책,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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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간혹 그런 생각을 하지만, 어렸을 때는 늘 그런 생각을 했었다. 마음이 한없이 넓어서 내가 무얼 하든다 받아주고, 나를 바르게 이끌어줄 남자 형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물론 그런 존재가 반드시 '형'일 필요는 없었다. 그것은 페소아 식으로 말하면, '세상의 비밀과 혼돈을 헤치고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이끌어줄 부성적인 손길'을 그리워했기 때문이리라. 나는 누군가에게 응석을 부릴 수도 없었고(당연히 응석을 받아줄 만한 사람도 없었고), 늘 책임을 강요받으며, 동생을 이끌어주고, 할아버지를, 아버지를 이해해주기만을 강요받았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러한 억압적이고도 뒤틀린 분위기에서 살아왔고, 그랬으므로 당연히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체득되는 것이 있었다. 그 속에서 정작 나 자신은 어떻게 '아이 같은 본능'을 억누르며 살아왔는지,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 나 역시 '삶의 바람이 한번 휘몰아치면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다시 땅바닥에 내려앉는 먼지'나 다름없는 존재였을 뿐인데. 그래서 나는 늘 다른 누군가 나를 이끌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룰 수 없는 바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는 살 수가 없었다. 오로지 바라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기도였으므로. 내가 지금 어느 한 부분이 뒤틀려 있고, 지극히 수동적이라면, 그런 내 과거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른다.

 

<맨 오브 스틸>이라는 영화가 있다. 극장에서 처음 보았을 때는 오로지 때려부수는 감각적 쾌락에만 집중하였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는데, 페소아의 저 글을 읽고 난 후, 케이블에서 방영하는 영화를 다시 보니, 주인공인 칼 엘(슈퍼맨)이 저렇게 바르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전부 그를 길러준 지구상의 부모 때문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를 낳아준 크립톤 행성의 부모들도 물론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슈퍼맨에게 끼친 영향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들은 수퍼맨을 낳자마자 지구라는 행성으로 그를 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과 인내 속에서 그의 성장을 지켜봐 준 건 지구에서의 그의 부모들이다. 그 부모들의 깊은 사랑과 올바른 가치관이 없었다면, 인류를 재난으로부터 구해내는 영웅 슈퍼맨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그게 아니었다면, 그는 인류의 영웅이 아니라 인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지구상 최악의 괴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맨 오브 스틸>의 진정한 주인공은 슈퍼맨의 부모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 부모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물론 슈퍼맨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먼지나 다름없는 존재인 인간들이 만들어낸 '부성적인 손길'에 다름 아닐 것이다. 페소아가 말한 '단단한 지지대, 우리의 작은 손을 편안히 맡길 수 있는 어떤 다른 손' 말이다. 하지만 그런 슈퍼맨조차 그의 부모, 다시 말해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부성적인 손길'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묘한 아이러니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므로 페소아의 저 문장들은 인간들의 나약한 본능을 드러내는, 참으로 적확한 문장들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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