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마법사들 중 하나의 이름을

시월의숲 2015. 8. 31. 21:26

죽어가는 보랏빛 속에서 하루가 흐르며 저물어간다. 그 누구도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지 않으리라. 내가 누구였는지 아는 사람도 없으리라. 나는 알려지지 않은 어느 미지의 산에서 미지의 계곡으로 내려왔다. 내 발자국은 저녁이 느리게 도래할 무렵 숲 속 개활지로 나 있었다. 내가 사랑한 모든 이가 그늘 속에 남겨진 나를 잊었다. 마지막 배에 관해서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누구도 쓰지 않았을 편지에 대해서, 우체국의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모든 것은 거짓이다. 다른 이들이 이미 이야기하지 않은 어떤 것도 그들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한때 희망에 차서 허위의 해안으로 출발한 자, 다가올 안개와 우유부단함의 아들에 관해서도 더 이상 자세한 소식을 듣지 못한다. 나는 마법사들 중 하나의 이름을 갖는다. 그 이름은,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그림자다.(363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봄날의책,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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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단순하고 아무런 수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한 울림을 안겨주는 문장이 있다. 물론 이것은 주관적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 문장에 반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왜 그런 것인지 딱히 이유를 댈 수 없는, 타인에게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오로지 나만이 느끼고 나만이 반응하는 특정한 문장을 대할 때면, 이상하게 가슴이 뛰면서, 반갑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한 묘한 감정을 느낀다. 페소아의 글을 읽다보면 그런 문장들에 흠칫하는 경우가 많다. '그 누구도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지 않으리라. 내가 누구였는지 아는 사람도 없으리라.' 나는 이 문장에 이상한 자극과 울림을 느낀다. 물론 이 문장이 다른 사람이 쓴 글에 들어 있었다면 내 느낌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오로지 페소아만이 부릴 수 있는 마법이 그 문장을 비롯한 두 개의 문단에 비밀스러운 매력을 부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냉소와 허무, 고독과 절망, 슬픔과 불안, 삶과 죽음,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페소아만의 알 수 없는 설렘과 기대감. 내가 사랑한 모든 이가 그늘 속에 남겨진 나를 잊을지라도, 마지막 배에 관해서 아무도 알지 못할지라도, 그 누구도 쓰지 않았을 편지에 대해서, 우체국의 그 누구도 알지 못할지라도, 그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임을. 그러므로 슬퍼할 것도, 기뻐할 것도 없음을. 그는 알고 있다. 그림자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미약하나마 빛이 존재해야 함을. 그가 바로 그림자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