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당신의 기억

시월의숲 2015. 9. 4. 20:48

그때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내 졸업식 이야기를 하게 된거지? 아, 그래, 그때 우리는 K가 직장을 다니면서 뒤늦게 대학교를 졸업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K는 한 학기를 남기고 휴학을 한 후, 소방관 시험에 합격해서 지금까지 일을 하다가 이제서야 졸업을 한 친구였다. 같은 대학의 동기였던 우리들은, 입학은 같이 했지만 졸업한 연도는 다 달랐다. 내가 졸업을 하던 해에, 누군가는 휴학을 했고, 누군가는 이미 졸업을 한 상태였으며, 누군가는 취업을 했다. 나는 휴학을 하지 않고 졸업을 했지만, 졸업식에는 참석하지 않고, 범죄자처럼 고개를 푹 숙인채, 과사무실로 가서 졸업장만 받아 나왔다. 물론 졸업사진도 찍지 않았다. 그때는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불필요한 일처럼 생각되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데는 아무래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따지고보면 졸업을 하는 학생들의 처지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거의 같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이상한(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를)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졸업식이고 뭐고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당시의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얼른 졸업장을 들고 나와, 아직 졸업하지 않은 친구의 자취방에 쫓기듯 들어갔었다(그런데 졸업장은 왜 그리도 찾아오려고 했을까, 그 또한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을). 그리고 아마도 술을 마셨겠지.


내가 기억하는 졸업식의 풍경은 그 정도다. 나는 동생의 졸업식은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하는데 반해 내 졸업식은 희미한 기억으로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친구들이 내 졸업식에 아버지가 왔었다는 말을 했을 때, 나는 내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버지? 아버지라니? 무슨 아버지를 말하는거지? 내 아버지? 그래, 바로 네 아버지 말이야. 네 졸업식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지. 우린 그때 졸업하지 않았잖아. 그런데 나는 왜 전혀 기억나지 않는걸까? 정말 내 아버지가 졸업식에 왔었단 말이야? 그래, 네 아버지가 네 졸업식에 왔었어. 그때, 네가 화를 냈던 것 같은데.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네가 무척 화를 냈었어. 그제서야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그날 아버지가 졸업식에 온 이유는, 내 졸업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날이 마침 내 졸업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친구들과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렀어. 아마도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음성과 얼굴에 진한 술기운이 묻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화를 낸 것이겠지. 그래, 그렇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날, 실제로 아버지를 만났는지 확실치 않다. 아마도 만났을 것이지만, 어쩌면 만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나는 기억나지 않는 일을, 기억한다고 해도 겨우, 누군가의 말에 의지해 어렴풋이 떠올렸을 뿐인데, 그것조차 확실한지 알 수 없는데, 누군가의 기억 속에는 남아 있다니.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내 과거를 기억해내다니.


나는 바닥이 약간 흔들리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지만, 내색은 하지 않으면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저들의 기억속에 남아 있는 나는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내 기억속의 나와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같을까. 타인의 기억 속의 나는 진정 나인가, 나를 닮은 또다른 타인인가. 왜 나는 그때의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한 것일까. 마치 도둑 맞은 것처럼 내 유년시절의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은, 내가 내 과거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인가. 기억하기 싫은 기억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내 무의식이 과거의 기억을 선택적으로 지워버린 것인가. 때로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친구들이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내 아버지를 말할 때처럼. 그럴 때면, 나는 내가 아닌 또다른 나를 만나는 것과 같은 낯선 기분에 휩싸인다. 나는 그럴 일도 없으면서, 종종 내 초등학교 때의 친구들을 만나지 않기를 바란다. 거리에서 그들과 마주치더라도 나는 물론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혹시라도 누군가 나를 알아보고 말을 걸어온다면 그처럼 두려운 일도 없으리라.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 잘못 보셨어요. 상대방은 순간 머쓱해하며, 하지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채로 나를 바라보겠지. 그러면 나는 아무런 미련없이 그를 지나쳐 내 갈 길을 갈 것이다. 나는 그를 모른다. 그도 나를 모를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없는 사람이 되어 다시는 만나지 못한채 생을 마감할 것이다. 그러는 편이 서로에게 나을 것이다. 우리는 만나도 만나지 못했고, 과거의 만남 또한 확실치 않으며, 모든 것은 불확실함이라는 블랙홀 속으로 빨려들어가 끝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이기에. 그것은 피를 나눈 가족이라고 해도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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