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우리는 만났고, 앞으로도 만나게 될 것임을

시월의숲 2015. 9. 29. 22:15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도대체 누구를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는 또다시 익숙한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그것은 해결이 되거나, 사라진 것이 아니라, 침묵 속으로 잠시 몸을 숨기고 있다가, 무방비해진 틈을 타고 불쑥 그 모습을 드러내어 모두를 고통스럽게 했다. 나는 잠시나마 홀가분함을 느낀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이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나를 찔렀다. 나는 화가 났지만 화를 낼 수 없었다. 오로지 차가운 슬픔만이 급속도로 나를 휘감아서 나는 잠시 어지럼증을 느꼈다. 나는 이해받고 싶었던 것일까. 누군가에게는 이해하지 못할 존재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르는 내가, 감히, 나를 이해해주기를, 적어도 내 가족만은 나를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 그것이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은 얼마나 큰 고통인가. 아버지는 말했다. 네 사정을 다 알고 있지만, 정작 내 입장에서 생각을 해 봤느냐고. 단 한 번이라도 내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고. 나는 그 말을 듣고 곧바로 항변을 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나는 늘 아버지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했으나, 정작 중요한 순간에 아버지의 입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나. 좀 더 깊이 누군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채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아버지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거기 있던 아버지와 가족들, 내 앞에 놓여있던 음식과 술, 우리가 앉아 있던 방, 과일이 상하는 냄새와 기름 냄새, 날아다니던 파리들, 시끄럽게 떠들며 온 방을 휘젓고 다니던 조카들, 거기 있던 모든 사람과 사물과 공간과 시간이 말못할 슬픔으로 나를 덮쳤다. 고모는 사려깊게 위로 아닌 위로의 말을 내게 했지만, 그것이 내 슬픔을 더욱 확실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말을 하는 고모조차 어떤 슬픔에 잠긴 채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기에, 나는 더욱 슬퍼졌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슬픔을 넘고 넘어서, 그것을 잊지못하고 고이 간직한 채, 지금 이 자리에 모여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러니 우리는 모이면 모일수록 더 슬퍼질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미래의 비참한 모습을 상상하며 몸서리치지만, 결코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느끼고는 더욱 깊은 쓸쓸함에, 더욱 깊은 고독감과 상실감에 빠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우리가 왜 만난 것인가. 서로의 비참함을 확인하기 위해서인가? 서로의 슬픔과 고통을 확인하기 위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을 절감하기 위해서? 하지만 우리는 만났고, 앞으로도 만나게 될 것임을 나는 예감할 수 있었다. 그건 이상한 일이었지만, 이상하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살아왔으며, 그렇게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시간을 통과해 여기까지 왔지만, 그렇게 통과한 시간 속에 네가 있었고, 우리가 있었다. 이 슬픔과 불안은 어쩔 수 없이 내가 감내해야만 하는 불치의 병과 같다. 지금껏 나를 지탱한 것은 무엇이었나? 나는 무엇으로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인가. 그것을 생각해야만 한다. 지금까지 나를 살게 한 것. 내가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던 이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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