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유예된 시간 속의 책들

시월의숲 2015. 9. 5. 22:04

나는 지금, 언젠가는 읽으리라 생각하며 샀던 책들이 꼽혀 있는 책장을 보고 있다. 언젠가는 읽으리라 생각했지만, 여전히 읽지 못한 책들, 아니 읽지 않은 책들을 바라보며, 내가 저 책을 언제 샀는지 기억해내려고 했지만, 결국 기억해내지 못했다. 읽고 싶은 책들은 갈수록 늘어나고, 사놓은 책들 중에서도 먼저 읽고 싶은 책을 우선 읽을 수밖에 없으니, 나중에 읽으리라 생각한 책들은 계속 더 나중으로 미뤄질 뿐이다. 어쩌면 나는 그 책을 읽지 못할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읽으리라는 다짐 속 언젠가는 언제이며, 나중에 읽으리라는 다짐 속 나중은 과연 어느 시점을 말하는 것인가. 계속 유예되기만 하는 시간 속, 불투명한 미래의 어느 순간 속에 존재할 뿐인 책들, 그 책들이 지금 나를 보고 있다. 내가 책을 보는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새로운 책을 사고, 아무렇지 않게 나중에 읽으리라 다짐하며 책장에 책을 꼽는다. 내 책장 속에는 유예된 시간 속의 책들이 쌓여간다. 유예된 시간이 자꾸만 더 유예된다. 언젠가 읽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얼마나 달콤한 환상인가. 그것은 거의 숭배에 가깝다. 하지만 그 모든 불가능성과 불확실성 속에서 환상을 숭배하는 일이란 또 얼마나 당연한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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