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으며, 아무것도 희망하지 않고,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다

시월의숲 2015. 10. 4. 21:34

나는 지극히 사교적인 성격인데, 지극히 부정적인 방식으로 그렇다. 나는 유화적인 편이다. 그렇지만 내 원래 성격보다도 더욱 유화적일 수는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나는 모든 존재들에게 시각적으로 호감을 느끼고 이성으로 다정함을 느낀다. 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으며, 아무것도 희망하지 않고,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다.(368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봄날의책,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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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인 방식으로 사교적이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가식적인 호감과 다정함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런 것 같다. 그는 그것을 '시각적인 호감과 이성적인 다정함'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나또한 페소아의 성격과 비슷한 면이 있다. 나는 늘 타인이 보는 나를 연기하며 살아가고 있으니까. 나를 온전히 드러내 보이지 않고, 마음 깊숙한 곳에는 차마 발설하지 못한 말들을 꾹꾹 눌러담으면서. 나는 실은, 페소아처럼 아무것도 믿지 않으며, 아무것도 희망하지 않고,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다. 페소아는 말한다. '나는 가족이 없는 것을 행복으로 여긴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를 사랑해야 할 의무가 없다. 아마 상황이 반대라면 나는 피할 수 없는 짐을 진 기분이었으리라. 나는 오직 문학적으로만 그리움을 느낀다(368쪽).' 또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한번도 누군가를 사랑해본 일이 없다. 내가 가장 사랑한 것은 나 자신의 감각이다.(369쪽)'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결론 짓는다. '이것이 내 도덕이다. 혹은 내 형이상학이다. 혹은 다르게 말해서 나 자신이다. 나는 모든 것을, 심지어 나 자신의 영혼조차 그냥 지나쳐버리는 한 사람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비인칭의 감각들이 모인 추상의 중심점, 세상의 다양함으로 시선을 향하고 그것을 응시하는, 바닥으로 떨어진 거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행복한지 불행한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차피 그 둘은 나에게 하나다(3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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