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쓴다는 것

시월의숲 2015. 10. 19. 23:43

쓴다는 것은 꿈을 만질 수 있는 형태로 바꾼다는 것이다. 쓴다는 것은 우리의 창조적 특성에 대한 가시적 보상(?)으로서 하나의 외부세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출간한다는 것은 이 외부세계를 타인들에게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타인들과 우리가 공유하는 외부세계가 이미 진짜 외부세계라면, 가시적이고 만질 수 있는 질료의 세계가 왜 필요하겠는가? 내 안에 있는 우주가 타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372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봄날의책,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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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있는 우주가 타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람들은 저마다의 우주 속에서 살아가며, 결코 자신의 우주를 타인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애초에 보여주지 않기 위해 보여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여줌으로써 보여주지 않는다. 다시 말해 너무 보여주려 함으로써 오히려 보여주지 않는 것이 된다. 이것은 말장난이 아니다. 그들이 보여주는 것은 그들 자신이 아니며, 그들 자신의 전시품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을 원래의 자신보다 덜 꾸미거나 더 꾸미려 하며, 보여주기 위해서 전시한다. 그들이 보여주는 그들의 모습은 늘 어딘가 과장되고 과잉되어 있다. 슬픔의 과잉, 행복의 과잉, 아름다움의 과잉, 불안의 과잉 상태. 거기 있는 내 모습은 진정 내 모습인가?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타인들의 모습을 보고 또 본다. 그들은 타인이 만든 우주 속에서 자유로이 유영하지만 결코 말 한마디 남기지 않은채 그저 염탐하듯 그들을 보면서 묘한 흥분을 느낀다. 그들은 타인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행복과 비교하며, 자신의 비참을 확인한다. 그렇다. 자신의 비참을 확인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타인의 우주를 본 댓가이다. 하지만 내 안에 있는 우주가 타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혹은 타인들의 우주가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거기에 각자의 '진실'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우리가 바라는 것은 가시적이고 만질 수 있는 질료의 세계인가? 하지만 페소아의 말처럼 타인들과 우리가 공유하는 외부세계가 이미 진짜 외부세계라면, 가시적이고 만질 수 있는 질료의 세계가 왜 필요하겠는가? 그것이 우리들의 꿈을 자극하기 때문에? '쓴다는 것은 꿈을 만질 수 있는 형태로 바꾼다는 것'이므로? 쓰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한다. 글과 사진의 차이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