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나는 아무도 아니며, 아무것도 아니다

시월의숲 2015. 11. 1. 20:15

오늘 나는 매우 불합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진실된 어떤 것을 깨달았다. 번개처럼 나를 관통하고 지나간 그것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인식이었다. 아무것도,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다. 번개가 번쩍하고 섬광을 밝힌 순간, 내가 그동안 도시라고 생각하고 있던 곳에는 빈 평원이 펼쳐졌다. 나에게 나를 보여주었던 음울한 빛은, 평원 위에 드리운 하늘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세상이 탄생하기도 전에 그들은 내게서 존재의 가능성을 앗아가버렸다. 내가 인간이 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오직 나 없이, 나라는 자아 없이만 가능할 것이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도시의 교외이고, 결코 쓰이지 않은 책에 대한 장황한 해설이다. 나는 아무도 아니며,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느낄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고, 원할 수도 없다. 나는 완성되지 않은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다. 나를 완성시킬 줄 모르는 어떤 자의 한 조각 꿈이 되어, 존재했었다는 과거도 없이 바람 속으로 날아가버린다.(457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봄날의책,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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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이 페소아가 느낀 불안의 정체이다. 아니, 불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확고하므로, 그것이 그의 정체성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도 되리라. 너무나도 확고한 불안이 그의 정체성이며,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인식에서 나온다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인식. 아무것도,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인식. 그렇다. 그것이 <불안의 서>를 다름아닌 페소아만의 <불안의 서>로 탈바꿈시킨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매우 불합리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진실'을 말하자면, 아무것도 아니므로 모든 것이 될 수 있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므로 모든 것을 원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그가 진정으로 바랐던 것일까? 아무도, 아무것도 아닐 수 있기를,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를 원하게 되는? 그가 되고자 했던 것, 그가 원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과 '모든 것' 사이의 어떤 지점에 있는 것일까? 혹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이 되고자 했던 모순적인 상태 그 자체에 있는 것일까. 그는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것'과 '모든 것'이 결국 동전의 양면처럼 같은 것임을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