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꿈의 흔적

시월의숲 2015. 9. 17. 21:58

우리가 진실이라고, 옳다고 여기는 많은 일들이 우리들 꿈의 흔적일 뿐이고, 잠에 취한 우리의 이성이 생각 없이 흔들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에 불과하구나! 도대체 그 누가 진실이 무엇인지,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가? 우리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많은 것들이, 장소와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일시적인 가치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에게 속해 있다고 망상하는 많은 것들이, 본성상 우리와는 아주 판이하며, 우리는 그들의 단순한 거울, 투명한 껍질에 지나지 않는다!(365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봄날의책, 2014.)

 

*

소리 소문없이 가을이 왔다.

어제의 여름은 이제 꿈의 흔적이 되어버렸다. 한 때 뜨거웠던 것들이 '장소와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일시적인 가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계절은 우리에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니다. 계절은 우리와는 아주 판이하며, 우리는 계절의 단순한 거울, 투명한 껍질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계절을 사는 것이 아니라, 계절이 우리를 통과해 흘러간다. 우리는 아주 변덕스럽게, 여름이면 겨울을, 가을이면 봄을 생각한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계절은 우리들의 그러한 변덕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소리 소문 없이, 돌아서면 어느새 눈앞에 당도해 있다. 그것은 당연하게도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늘 계절보다 한 발 늦고, 우리가 쫓는 것은 언제나 앞선 계절의 흔적일 뿐. 그러므로 우리는 계절이 우리를 잘 통과할 수 있도록 몸을 한껏 열고 깊이 숨을 들이마시면 된다. 나는 가을의 단순한 거울, 투명한 껍질이 되는 것을 주저하거나 슬퍼하지 않겠다. 가을이 나를 통과해 흘러가듯, 나 또한 그렇게 가을을 통과해서 흘러갈 것이다. 아무런 미련도 회한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