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몇 권의 책과 함께

시월의숲 2015. 10. 21. 23:16

읽고 있는 책이 잘 읽히지 않는 것은, 계절 탓이라거나 마음의 여유가 없는 탓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내가 그 책에 더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그 책이 정말로 형편없는데다가분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책이 가진 매력을 내가 진정으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을 거의 반 넘게 읽었는데, 반 넘게 읽기까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그것은 그 책이 결코 따분하지 않고 읽으면서 어떤 놀라움마저 느꼈으면서도 책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앞서도 말했지만 그 책이 가진 고유의 매력을 내가 십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중 배수아의 몽골 여행기인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이 출간되었고, 나는 늘 그랬듯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 책을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으므로, 당연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일은 잠정 중단되었다. 희한하게도(어쩌면 당연하게도) 배수아의 책을 읽는 일은 내게 큰 즐거움을 주었고, 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보다 훨씬 빨리 그 책을 읽었다. 그러므로 책이 잘 읽히지 않는다고 계절 탓을 하거나 마음의 여유 혹은 피곤함을 말하는 것은 어쩌면 근본적인 이유가 아니라 부차적인 이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지금은 가을이고, 마음의 여유는 늘 없고, 나는 항상 피곤하므로. 이런 와중에 나는 또 악스트(Axt) 2호(9~10월)를 주문하면서 일 년치 정기구독을 신청했으며, 어제 책을 받았다. 정기구독을 신청하는 일이 처음엔 내키지 않았는데, 앞으로 일 년 동안 내가 그 책을 받아야 하는 주소를 기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자주 옮겨다니며 생활하고 있었고, 앞으로 내가 어디로 가게 될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었으므로 지금 내가 거주하고 있는 장소를 기재하는 것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미래의 일을 미리부터 걱정하기는 더더욱 싫었으므로, 일단 지금 있는 주소를 기재하기로 했다. 페소아의 <불안의 서>는 이제 거의 끝에 다다르고 있지만, 이것은 내가 처음부터 의도한대로 천천히 읽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며, 다 읽고나서 어쩌면 한 번 더 읽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든다. <불안의 서>는 한 번에 다 읽기보다는 늘 곁에 두고 손길 가는데로 읽어나가는 것이 그 책에 더 어울리는 일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권의 책으로 이 가을을 성큼성큼 지나고 있다. 이천십오 년의 시월을.

'어느푸른저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어디에 있든지 나는 여기에 있지만 여기에 있는 건 내 현상뿐  (0) 2015.10.28
용문사  (0) 2015.10.25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0) 2015.10.20
창문  (0) 2015.10.18
각자의 방  (0) 2015.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