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용문사

시월의숲 2015. 10. 25.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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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용문사를 다녀왔다. 그냥 용문사가 아니라, 반드시 '가을의' 용문사라고 해야한다. 용문사는 가을이 아니라도 가끔 찾아가는 곳인데, 내 고향에 있는 절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절의 고요함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인지, 다른 절보다는 마음에 더 끌리는 것이 있었다. 자동차로 절 입구까지 갈 수 있었지만, 나는 일부러 맨 아래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절까지 걸어서 올라갔다. 나는 천천히 걸으며 본격적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나뭇잎들을 바라보았다. 단풍이 든 나무들을 보고 있자니 예전에 들렀던 선운사가 생각났다. 더 정확하게는 선운사 가는 길 말이다. 선운사도 선운사지만, 선운사 가는 길의 단풍이 워낙 유명하여 가을철이면 사진작가들과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몸살을 앓는 곳이었다. 물론 그곳의 단풍은 무척이나 선명하고 아름다운 것이 사실이지만,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그런 곳보다는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호젓한 길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용문사를 몇 번 와보고 느낀 이 절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고요함이니까. 그 고요함으로 천천히 명상을 하면서 걸을 수 있으니까. 나는 일요일에다가  한창 단풍이 드는 가을임에도 불구하고 조용하기 이를데없는 이 절이 마음에 들었다. 햇살이 아직 조금 따갑게 느껴지기도 했으나, 그늘 아래를 걷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햇살의 따가움과 그늘 아래의 시원함이 가을 하늘만큼이나 선명하게 대조되어, 나는 약간의 현실감을 잃은채 길을 걸었다. 나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천천히 절을 둘러보았으며, 예전에 왔었지만 보지 못한 곳까지 구석구석 들여다 보았다. 어디선가 피워놓은 향냄새가 코끝을 자극하기도 했다. 문득, 절만큼 산책하기 좋은 곳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어쩐지 오늘만큼은 불교신자이고 싶었다. 나는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무엇을 위한 기도인지 스스로에게 묻지도 않은채) 가늘게 눈을 뜨고 있는 부처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이곳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모든 것을 다 아는듯한 얼굴을 하고서. 나는 부처상 앞에서 한참을 서있다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천천히. 산길을 내려오면서 잠시 눈을 감았다. 내 몸이 마치 와해되는 것 같은 느낌, 사라져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발걸음이 쉬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사라져버린다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했으나, 이상하게도 슬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경이로움이 전신을 사로잡아 놓아주지 않았다. 그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