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창문

시월의숲 2015. 10. 18.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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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들어간 그곳은 화장실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바로 보이는 창문으로 빼곡히 들어찬 나무들이 보였고, 그 사이로 시월의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햇살이 눈부시게 빛났으나, 그것은 빼곡히 들어찬 나무들이 아니었다면, 그 나뭇가지들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아니었다면 큰 감흥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나는 무엇에 이끌리듯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사진으로 보는 느낌은, 당시 그 자리에서 내가 받았던 느낌의 삼분의 일도 채 되지 않는다. 창문의 검은 틀이 커다란 캔버스가 되었고, 창밖의 풍경이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저렇게 멋진 창문이 있는 화장실을 본 적이 없다. 우연히 들어간 화장실이 미술관이 되어버린 희귀한 경험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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