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시월의숲 2015. 11. 16. 23:03

언제 베이는지도 모르게 뭉텅뭉텅 베어져 나간 내 시간의 살이여. 나는 그 시간을 살고 있지만, 내가 사는 이 시간을 알 수가 없어 늘 어리둥절하다. 나는 살고 있지만, 살고 있음을 모르는 이 아이러니는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내게 주어진 시간을 나는 그저 모르고만 있다가, 어느 순간 아찔해져 고개를 들어보면 이미 저만치 무언가 지나갔고, 내 안의 무언가가 이미 빠져나갔다. 나는 길 잃은 아이처럼,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는 아이처럼, 그저 허망하게 울 수밖에 없는 것인가. 내가 방금 지나온 길을 알지 못하고, 내 손에 무엇이 들려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그저 멍한 얼굴로. 그렇게 시간을, 내 안의 무언가를, 나는 자꾸 흘리고만 있음을.

 

시간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며칠 전 만났던 누군가와의 대화가 불현듯 생각이 났는데,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기록해 두려고 한 것인데, 내 의지와는 다르게 엉뚱한 말이 먼저 튀어나오고 말았다. 왜 갑자기 시간에 대해서, 그렇고 그런 말들을 늘어놓게 되었는지. 벌써 11월이고, 남은 달력도 이제 한 장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일까. 내 오랜 바람과는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초연해지기는커녕 점점 더 두려워지기만 하는 마음이 무섭기 때문일까.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똬리를 튼 채, 호시탐탐 내 몸을 틀어쥐려고 기다리고 있음을, 시간이 갈수록 더 강하게 느끼기 때문일까. 혹은 그 모든 것들은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고, 진짜 원인은 그가 갑자기 내뱉었던 '살'이라는 말 때문인가.

 

그는 '살'이라고 말했다. 나는 술이 많이 취했고, 그도 아마 술이 많이 취했을 것이다. 나는 자꾸 까무룩 해지려는 정신을 부여잡고,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살?' 나는 되물었고, 그는 다시 '살'이라고 말했다. 나는 내 오른손을 그의 얼굴에 갖다 대며, '이 살을 말하는 건가?'라고 물었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왜 그런 말이 나왔던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때 그는 나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 자신, 정확히는 그가 보는 나, 그가 보는 내 모습에 대해서. 그것은 아무런 맥락이 없고, 황당하며, 뜬금없는 이야기였지만, 나는 그가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살과 살의 맞닿음, 어떤 온기, 타인의 체온, 뭐 그런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 내게 부족한 건 바로 그러한 것들이라고. 그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이미 나도 충분히 알고 있는 일이었으므로.

 

나는 내게서 흘러가 버린 시간을 대하듯,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의미 없이 허망하기만 그의 얼굴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자신의 꿈이 낯선 이국의 땅에서 아무도 모르게 객사하는 것이라고 담담히 말하던 그의 얼굴을 보면서, 우리는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꿈을 꾸고 사는 것이 아니겠냐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술이 많이 취했고, 취기가 아닌 알 수 없는 열기로 술집을 나왔으며, 찬 바람을 맞으며 조금 걸었고, 집으로 와 정말 죽은 듯이 잠에 빠져들었다. 그 순간만큼은 흘러가는 시간도, 자꾸만 커지는 내 안의 두려움도 잊었다. 하지만 새벽에 잠에서 깨었을 때, 이상한 슬픔이 목까지 차올라 한동안 숨을 쉬기가 어려웠던 것은, 그가 한 말이 생각나서가 아니라, 어쩌면 지독히도 슬픈 꿈을 꾸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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