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어떤 산책

시월의숲 2015. 11. 23. 00:29

낮이었는데도 밤 같았다. 아버지와 나는 냇가를 따라서 걸었다. 산책을 하려고 나온 길이었는데, 하늘은 구름에 가려 어두웠고, 냇가 주위로 공원 조성을 위해 파헤쳐진 흙이 여기저기 쌓여 있었으며, 읍내에서 조금 떨어진 냇가 주위로는 온통 시커먼 시멘트 벽이 육중하게 버티고 있어서, 쌀쌀한 날씨와 어둠, 뿌연 안개와 더불어 한층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침부터 낀 안개와 구름이 오후가 되어도 걷히지 않아서 애초에 우울한 기분을 전환하려고 나온 것은 아니었으나, 막상 냇가를 걷고 있자니 더 우울해지는 기분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 기분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는데, 햇살 가득한 거리를 걸을 때와는 다른 느낌을 안겨주었기 때문이었다. 산책이 늘 화창한 햇살 속을 걷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것이 왜 좋은지 알 수 없을 것이며, 어둡고, 안개로 가득한 거리를 걷는 일의 은밀함 또한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평소 산책을 했던 길보다 조금 더 먼 곳까지 걸었다. 아버지는 나를 생각해서 이쯤에서 돌아가자고 하였으나, 나는 저기 보이는 저 다리까지 가자고 말했다. 우리는 몇 개의 리(지금은 도로명으로 바뀌었겠으나, 나는 아직 도로명을 알지 못한다)를 지나 조금은 낯선(많이 지나다녔음에도) 곳에 있는 다리를 건넜다. 그 다리는 돌로 만들어진, 많이 낡고 군데군데 부서진 다리였는데, 바로 옆에 새 다리가 놓여 있었다. 우리는 차가 들어오지 못하는 오래된 돌다리를 건너, 처음에 왔던 곳을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주위는 더욱 어두워졌고, 한 두 방울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냇가 주변에 위치한 집에서 노란 불꽃이 보이더니 이내 타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무엇을 태우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서늘한 공기를 타고 흘러와 코를 자극하는 알싸한 냄새 때문에 나는 설명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기분 때문에 나는 옆에 있는 아버지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는 그렇지 않나요. 꼭 이렇게 공기가 차가워지는 계절에, 이렇게 주위가 어둑어둑하고 희뿌연한 어떤 날에, 어디선가 타는 냄새를 맡으면, 순간 어느 특정한 시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나요. 어딘가 아련하고, 울음을 참고 있는 것도 같고, 슬프면서도 어떤 따스함이 느껴지는, 그런 기분이 들지 않나요. 그리운 누군가가 몹시도 생각나지 않나요, 아버지. 아버지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아버지의 대답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순간 급격한 슬픔이 몰려왔는데, 이상하게 하나도 슬프지 않은 슬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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