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간다

크림슨 피크

시월의숲 2015. 11. 28. 22:00



평소 영화를 볼 때마다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오늘따라 더욱, 영화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서서 나가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렇듯 핏빛으로 가득한, 기이하고 잔인한 사랑 이야기를 보고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 바로 일어서서 나갈 수가 있는가. 나는 영화가 끝나고도 남아있는 어떤 여운 때문에 바로 일어설 수 없었다. 스크린에 제작자들의 이름이 올라갈 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고 음악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그것은 일종의 사로잡힘의 경험이었으리라. 영화를 본 관객이라고는 나를 제외하고 세 명밖에 되지 않았다. 난방이 되지 않아서인지, 관객이 얼마 없기 때문인지, 영화관은 조금 썰렁했다. 어쩌면 영화 때문에 조금 더 서늘해졌는지도 모른다. 나는 가만히 앉아 음악에 귀 기울이면서, 영화 속 저택 '크림슨 피크'를 떠올렸다. 또한 이디스(미아 와시코브스카)와 토마스(톰 히들스톤), 루실(제시카 차스테인)의 관계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들이 내게 주었던 어떤 감정의 덩어리를 가만히 느껴보았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의 정체는 무엇인가. 무엇이 나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가.


이 영화는 다들 알다시피, 공포영화가 아니다. 단지 유령이 나오는 영화일 뿐이다. 더구나 사랑 이야기다. 시각적인 아름다움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감독이 <판의 미로>에서 보여준 어떤 불안하면서도 기괴하고, 불결하면서도 불길한 매력은 사라진 것 같아 좀 아쉬웠다. 대신 보다 화려해지고 아름다워졌으니, 이건 이것대로 좋고, 또한 이것이 이 영화만의 매력이라고 해야하리라. 유령이 나오는 영화이긴 하지만, 유령보다 더 무서운 건 역시나 인간이라는 사실을 이 영화를 보면서 새삼 깨닫는다. 유령만큼이나 (그것이 무엇이든, 무엇에든) 벗어나지 못하는 것 또한 인간이기도 하다는 것을. 우리는 파국으로 치달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파국으로 치닫기 전에는 무언가 잘못되어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돌이키지 못하는 것일까? 하지만 파국의 결과가 반드시 문제의 해결이나, 어떤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되지 못한다면? 만약 그렇다면, 그제서야 우리는 비로소 영화 속 이디스처럼 유령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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